[시론] 6·25와 천안함, 중국은 달리 생각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북한의 6·25 남침 때, 당초 중국은 북한 지원을 망설였던 것으로 역사는 쓰고 있다. 건국한 지 1년도 채 안 된 중공정권은 3년여에 걸친 국공내전으로 인한 극심한 전쟁피로와 막대한 피해 때문에 유엔군과 싸울 여력이 없었다. 국내에서 발생한 대홍수로 이재민이 수천만 명 발생했고, 남은 군사력을 집중해 대만을 통일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약점을 무시하고 북한을 돕겠다고 마오쩌둥이 결심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1946년부터 3년간 장제스의 군대와 싸울 때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동북지방을 처음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과 북한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북한군이 연전연패하자 다급한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간절한 구원 요청 서신을 보내왔고, 북한을 잃으면 신생 중공정권의 안위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북한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같은 공산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중국 인민의 희생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5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끝났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중국은 정책을 바꾸었다. 덩샤오핑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사구시 정신으로 이웃나라 한국 박정희의 개발 모델을 벤치마킹하고자 개혁개방을 채택했다. 때맞춰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해외자본을 적극 유치해 경제개발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중국은 군사 면에서 북한을 계속 지원했다. 북·중 양국의 군사지도자들은 6·25를 미 제국주의에 대항해 승리한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매년 이를 기념했다.

그러나 북한은 6·25를 김일성의 탁월한 전쟁지도 덕분에 승리한 전쟁으로 대내외적으로 각색 선전하면서 중국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북한의 전쟁기념관이나 역사박물관에서는 중국의 국기나 인민지원군의 희생과 공헌을 적어놓은 것을 찾기 힘들다.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이 방치되기도 했다. 게다가 북한은 탈냉전 이후 온 세계가 경제발전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동안 민생을 희생하면서 선군노선을 채택하고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렸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협력함으로써 화평발전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군사적으로는 북한을 지원해 왔다. 북한이 핵무기로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비확산체제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맨발로 다니는 자는 구두 신은 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光脚者不<6015>穿鞋者:광각자불파천혜자)”라고 하면서, 북한은 제재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제재보다는 지원을 통해 설득해야 한다고 북한을 변호하고 지원했다. 그 결과 북한은 핵무기를 더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을 더 멀리하게 되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미래 30년을 기획해야 하는 올해 발생한 천안함 사태는 중국에 중요한 역사적·상징적 의미를 주고 있다. 이 사태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 중국이 스마트파워로서 현명한 정책결정을 하게 되면 중국의 미래 30년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 30년이 화평발전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다시 북한발 도발로 인해 불안과 암흑의 30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중국은 무엇을 해야 되는가. 중국은 실용을 존중하는 실사구시 정신과, 공통점은 확대하고 차이점은 축소시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을 따르면 된다. 한국과 국제공동조사단이 발견한 북한의 어뢰 공격 증거를 미국·일본·호주·유럽연합 27개국 등 국제사회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공통점을 받아들여, 북한이 다시는 기습 군사도발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면 된다. 향후 30년 이내 중국은 미국과 G2 시대를 거쳐 세계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다시는 북한의 군사도발로 인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북한에 이번만은 “노(NO)”라고 함으로써, 중국이 주창하는 평화스럽고 조화스러운 세계(和諧世界)가 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용섭 국방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