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양념 치면 어떤 학문도 맛깔 난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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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모든 강의는 영화로 통한다? '. 1990년대 이후 영화는 한국 대중문화의 꽃이다. 젊은 층은 일견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영화에 몰두하고 있다. 영화이야기는 일상의 빈 시간을 때우는 잡담에 그치지 않고, 과거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고담(高談)의 마당에 까지 그림자를 뻗쳤다. 대학에서는 강좌 이름에 '영화'라는 단어를 살짝이라도 걸쳐야 학생이 몰린다고 한다. 영화를 '미끼'로 던지지 않으면 웬만해선 학생들의 열기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게 일선 교수들의 체험담이다. 자신의 전공을 영화와 '접목'시켜 책으로 펴낸 교수 3인이 이같은 시대 풍경에 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영화로 읽는 경제학』의 저자 최병서 교수(49·동덕여대 경제학),『영화 속의 법과 이데올로기』의 김욱 교수(43·서남대 법학),『영화 속의 철학』의 박병철 교수(38·부산외국어대 문화학)가 그들이다.

최병서 교수:이거 대학에서 퇴출 대상 1호인 전공자들만 모였군요.하하하. 학부제 실시 이후 철학·역사·문학 등 인문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죠. 제 전공인 경제학도 경영학에 밀려 많이 어려워요. 경제학은 수학이 많이 등장하니까 건조하고 딱딱한 편이죠. 그래서인지 요즘 대학생들은 첫 시간 강의를 듣고 나면 '으악'하고 나자빠져요. 하도 수업을 재미없어 해 영화이야기로 강의를 풀어갔더니 졸던 애들이 사라지더라구요.

인문학 관심끌기 작전

김욱 교수:저도 강의를 쉽게 풀어가려고 영화를 도입했죠. 하지만 영화 자체에 법과 이데올로기라는 코드가 내재해 있기도 해요.이런 부분은 영화전공자나 평론가들이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해요. 예컨대 폴 버호벤 감독의 '로보캅'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너는 인간이냐 기계냐."

그런데 로보캅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기계지요. 이건 법의 성격이기도 해요. 법은 자판기에서 물건을 뽑듯 정해진 프로세스를 따라 집행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전의 정이나 교화의 가능성을 따져 훈방이나 석방을 하기도 하거든요. 따라서 로보캅의 모순적인 속성은 곧 법을 상징하는 걸로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박병철 교수:젊은이들은 한결같이 가벼운 '재미'만 찾아요. 배우자의 조건을 꼽을 때도 반드시 유머있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넣쟎아요. 그러니 난해하다는 인상이 강한 철학에 학생들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죠. 가벼운 것만 횡행하면 안 되는데, 무거운 것도 필요한데,라고 생각하다가 영화를 떠올렸죠. 영화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우니까 철학이라는 무거움을 상쇄하고 조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최:대학 커리큘럼에도 문제가 있어요. 내가 대학 다니던 1970년대에 비해 사회가 변했고 대학과 대학생들도 엄청나게 바뀌었는데 교과 과정은 제자리 걸음이에요. 경제학의 경우 교과 과정이 엘리트를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학자가 될 사람들 위주로 돼 있다는 거죠.

김:영화에 관한 책을 냈다고 하니 일부 교수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더군요. 그러나 학생이 변한 만큼 가르치는 이들도 변해야하는 건 당연하지요.

박:얼마 전 김용옥 교수의 TV 강의가 대단한 화제를 모았죠. 그걸 보면서 일반인들의 철학을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철학을 쉽게 풀어주는 책이나 강의, TV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는 많다는 거지요. 대학생들도 그래요. 굳이 철학을 전공하고 싶진 않지만 알고는 싶다는 거지요. 학생들의 요구가 그렇다면 그런 흐름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

최:10년전에 이런 책을 냈다면 아마 교수 사회에서 '웬 미친 놈 다 있냐'는 식으로 봤을 거예요. 하지만 요즘은 동료 교수들도 "어, 내가 낼려고 했는데 김 교수가 선수쳤네"라며 농담을 던질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예요. 그렇다고 무슨 잡학을 하자는 건 아니에요. 책을 쓰면서 가장 유의했던 대목도 흥미롭게 경제학에 다가가되 경제학이 가진 이론적인 매력을 동시에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이론 단순화시킬까 조심

김:영화를 끌어들여 법을 설명하는 시도가 법학이 가진 본연의 이론을 단순화할 위험은 물론 있어요. 그러나 학부생 수준에서 그들의 관심을 법학으로 유도하는 데는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같은 이야기도 왜 영화로 풀면 학생들이 더 쉽게 이해하는지, 가르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박:내 책에는 기존의 철학서와는 달리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헤겔도 등장하지 않아요. 철학이란 철학자의 이름과 개념을 익히는 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철학의 근본이라면 그런 방법론을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어요.

최:한편으로 생각하면 우수한 자질을 가진 신입생들이 대학에 들어왔다면 이런 '변칙'을 부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요즘 대학생들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진 게 아닌가하는 거죠. 듣자하니 미적분을 만화로 가르치기도 한다더군요.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은 사실 좀 개탄스럽기도 해요.오죽하면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만화나 영화를 끌어들여야 했을까, 한숨이 나올 때가 있어요.

학생들 학력저하도 문제

박:우리시대가 문명사적인 전환기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활자 시대가 서서히 가고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지 않나요. 요즘 학생들은 '죄와 벌'을 읽기보다는 영화 '죄와 벌'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고 있어요. 이런 변화는 한국뿐 아니라 서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것 같아요.

김:세상은 급변하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미지가 세상을 이해하는 주도적인 매체가 되리라는 거죠.

박:책을 쓰면서 새삼 느낀 점이지만 외국 영화에는 인문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 많아요. 하지만 최근 한국 영화는 기발한 아이디어에만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아요. 앞으로 철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깊은 감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관객들의 안목도 깊어져야 할 거구요. 우리가 쓴 책들이 이런 풍토를 조성하는 데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책을 낸 보람으로 충분할 겁니다.

정리=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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