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슬로푸드, 느림의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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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바닷물이 맑으니 전복이 맛있제.”

해녀 생활 35년째라는 고순심(55)씨는 전남 청산도 전복 자랑을 늘어놨다.

“전복은 이 바위 저 바위 옮겨 다니면서 해초를 뜯어 먹고 살거든. 그러니 전복이 먹는 자연이 깨끗해야 전복도 좋제. 여긴 물이 에메랄드빛이잖여.” 또 다른 해녀 손애순(59)씨가 거들었다.

서두름과 간섭 없는 곳에서 자연이 오랜 시간 품어냈을 때, 슬로푸드는 비로소 완성된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해녀 고순심 씨가 갓 딴 전복을 들어보이고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청산도 해녀들의 자랑거리다.

청산도에서 전복잡이를 떠난 배 ‘시내호’ 위에선 두 시간 내내 수다가 이어졌다. 전복을 따기 위해 오전 7시에 출발했지만 파도가 잔잔한 곳을 찾아 두 시간째 바다를 헤매는 중이었다. 9시가 돼서야 배는 온동리 앞바다에서 멈춰 섰다. 해녀들은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어 돌고래처럼 수면 위아래로 들락거렸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참았던 숨을 몰아 쉬느라 꺽꺽댔다. 오후 1시. 네 시간의 물질 끝에 올라온 해녀들은 다들 입술이 퍼랬다. 그중엔 전복을 달랑 한 마리밖에 따지 못한 이도 있었다. 김민자(69)씨는 “전복은 한 번에 확 찍어 따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이들이 딴 전복은 청산도 바다에서 자연 양분을 섭취하며 5년 이상 자란 것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해녀들은 큼지막한 자연산 전복을 통째로 건넸다. 씻지도 않은 전복에선 싱싱하고 싱그러운 바다 냄새가 났다.

청산도는 국내에 6개 있는 슬로시티 중 한 곳이다. 전복은 이 슬로시티가 지정한 슬로푸드다. 슬로푸드란 ‘제 고장에서 난 제철음식’을 말한다. 주로 오염되지 않은 우리 땅에서 천천히 자라난 것들이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에 대한 반발에서 생겨난 말이다. 1986년,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맥도날드가 들어온 것에 충격 받은 요리 칼럼니스트 카를로스 페트리니가 ‘미각의 즐거움, 전통음식 보존’을 기치로 내걸고 쓴 게 처음이다. 지금은 100여개국 8만여 명이 참여하는 세계적 규모의 운동으로 성장했다. 식생활에서조차 ‘빠름’과 ‘표준화’가 미덕인 현대 사회에, 슬로푸드는 ‘느림’과 ‘지역화’로 반기를 든 것이다.

해녀들이 연신 건네준 전복. 시내호의 홍춘복(57)선장은 “전복은 통째로 먹어야 영양분이 빠져나가지 않는다”며 껍질만 떼 줬다. 통째로 씹는 전복 맛은 쫄깃쫄깃했다.

청산도뿐 아니라 슬로시티들엔 저마다의 슬로푸드가 있다. 전남 장흥의 유치마을은 표고버섯, 담양의 창평마을은 전통 장과 쌀엿·한과가 대표적인 슬로푸드다. 신안 증도는 천일염, 경남 하동의 악양마을은 차와 대봉감, 충남 예산의 대흥마을은 어죽과 붕어찜을 슬로푸드로 내놓고 있다. 슬로시티마다 자부심을 바탕으로 슬로푸드 운동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증도에선 지난해 5월 ‘증도 웰빙 맛자랑 대회’가 열렸다. 증도면 모든 식당 종사자와 주민들이 참가했다. 당시 행사를 주최했던 슬로시티 관계자 정영진(27)씨는 “증도의 음식을 찾겠다는 생각에서 대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주민들 반응이 뜨거웠어요. 백합탕부터 낙지 호롱이, 숭어 건정이 등 증도의 신토불이 재료를 이용해 특색 있는 음식들을 만들어냈죠.” 증도면에선 그 후 국제행사가 열릴 때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사절단에 대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25일 ‘제3회 슬로시티 총회’가 열린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슬로시티의 슬로푸드들이 전 세계에 소개될 예정이다. 그래서 슬로푸드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세계인을 매료시킬 우리의 슬로푸드를 먼저 맛보러 말이다. 여섯 개의 슬로시티 마을엔 ‘느림’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슬로푸드들이 있었다.

글·사진=이상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TIP 한국의 슬로시티는 6곳

슬로시티란 슬로라이프를 실천하는 마을로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지정한다. ‘느리게 먹기’와 ‘느리게 살기’가 주요 가치다. 첫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로 1999년 지정됐다. 한국에선 2007년 신안 증도, 완도 청산도, 장흥 유치, 담양 창평이 슬로시티가 됐으며, 지난해 하동 악양과 예산 대흥이 뒤를 이었다. 전 세계의 슬로시티 시장 70여 명이 4박5일 동안 한국의 슬로시티들을 돌아보는 대규모 국제행사인 ‘제3회 국제 슬로시티 총회’가 25일 한국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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