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북한 디지털 北

그때 오늘 - 6·25전쟁 ② 스탈린,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남한 침략을 ‘허가’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1950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 왼쪽 끝에 박헌영이 보인다.

1950년 3월 말 김일성이 부수상 겸 외상인 박헌영과 함께 소련을 방문, 스탈린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한반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스탈린은 이를 허가했다. 스탈린은 단순한 허가뿐만 아니라 옹진 지역으로부터 전쟁을 확대해 나가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49년 봄 김일성과 만났을 때 전쟁에 반대했던 스탈린이 왜 1년 만에 견해를 바꾼 것일까? 우선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49년 스탈린은 북한 군대가 충분히 강하지 않으며, 주한미군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또 다른 요인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과 중국의 공산혁명으로 인한 자신감이었다. 스탈린은 미국 내에서 외부의 일에 개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 역시 이에 동의했다. 결국 1950년의 전쟁을 허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한반도에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판이었다. 1949년 이후 미국은 대외전략을 수정해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패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개입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1950년 초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주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치슨 선언에서는 방위선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유엔을 통한 개입의 가능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아울러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화 속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박헌영의 언급이다. 박헌영은 남한에 수십만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으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이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1950년 초까지 남한에 있었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거나 토벌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는 당시 남한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심각한 오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스탈린·김일성·박헌영의 오판이 모두 ‘실수’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전쟁의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최근 유럽 학자들은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한반도에서 ‘실험’을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 그리고 전후에도 미국의 주요 관심이 유럽에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역시 스탈린의 오산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전쟁 발발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판단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오산과 오판은 전쟁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그때 오늘 - 6·25전쟁 ①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 방한 … 귀국 3일 후 북한군 전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