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부시 "미 기업들 소송에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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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들이 소송에 멍들어 경쟁력을 잃고 있다. 의회가 나서 기업을 보호할 법을 만들어야 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 옆 레이건 연방빌딩에서 열린 경제정책 토론회에서 '소송 망국론'을 제기했다. 대통령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함에 따라 '변호사와 소송의 나라' 미국에 어떤 변화가 올지 주목된다.

이틀 일정의 첫날 회의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 기업들이 각종 소송과 그에 대비한 보험에 드느라 다른 나라 기업들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이없는 소송으로 문을 닫는 중소기업도 나오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일하다 다친 근로자는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지금과 같이 '미쳐 날뛰는(run amok)' 소송 관행 아래서 작은 기업들은 살아남기가 몹시 힘들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에번스 상무장관은 이날 "소송 남발로 인한 비용(tort cost)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인 2500억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토트(tort)'는 범죄는 아니지만 고의나 과실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특히 제조업체의 경우 전체 비용의 4.5%가 소송 남발에 따른 비용이라고 말했다. 이는 제조업체의 전체 비용 중에서 노동과 임금 비용이 17.5%에 달하는 것을 고려할 때 엄청난 규모다.

앞으로 4년간 끌고 갈 경제정책의 틀을 만들기 위해 기획된 이날 회의에는 기업인, 경제학자, 워싱턴 정가의 로비스트 등이 초청됐다. 부시 대통령은 의료 분야의 소송 남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로 인해 의료비와 건강보험료가 높아지고 이는 결국 기업들의 채용을 막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뉴욕 타임스도 지난 8월 경기 회복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부진한 것은 치솟는 건강보험료 때문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한 달 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부양가족 셋을 둔 근로자 한 명의 연간 보험료가 9950달러인데 이 중 73%를 고용주가 부담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집단소송과 석면 피해 분쟁, 의료 분야 소송을 기업에 큰 짐을 지우는 3대 소송으로 지목하고, 새로 구성된 의회가 이런 소송의 남발을 막는 법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송을 낸 사람들이 받는 보상금에 상한선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이런 방향으로 사법제도를 고치면 창업도 쉽고, 일자리 구하기도 쉬워질 것"이라며 "이 작업은 앞으로 경제 도약을 위해 매우 중요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년 초 국정 방향을 담아 발표하는 연두교서에서도 이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송 남발 규제안에 대해 미 하원은 대체로 찬성하지만 상원은 반대하고 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런 법이 석면과 관련된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실제로 이날 석면을 만들거나 많이 사용하는 업체들의 주가는 5~8% 뛰었다.

◆한국에도 '경고등'=기업들이 소송에 시달리는 것은 비단 미국뿐이 아니다. 한국도 각종 법규가 소비자나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쪽으로 강화되면서 기업들이 소송에 시달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리콜제가 강화되고 2002년 기업이 자사 제품으로 인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제조물책임(PL)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최근 기아자동차.LG전자 등이 대량 리콜 파동을 겪었다. PL법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올 상반기에만 1215건에 달한다.

재계는 특히 내년에 도입되는 증권집단소송제가 소송 남발 사태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전경련은 전체 기업의 86% 이상이 분식회계로 인한 집단소송을 우려해 내년 이후 발생하는 분식행위부터 적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법을 소급적용할 경우 쏟아지는 소송 때문에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극심한 내수 침체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으로 기업의 시설 투자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소송까지 겹치면 투자 심리 및 기업의 의욕은 더욱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박혜민 기자

[바로잡습니다] 12월 17일자 E1면 '미국 기업들 소송에 멍든다'기사의 그래픽에서 다우코닝은 1998년에 '파산'한 게 아니라 '법정관리'신청을 했고,이후 경영혁신을 통해 지금은 정상적으로 기업활동을 하고 있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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