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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자책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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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2발.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콜롬비아팀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귀국한 뒤 4인조 강도가 그의 몸에 퍼부은 총알 숫자였다. 예선 A조 미국과의 경기에서 기록한 자책골이 화근이었다. 상대 팀의 센터링을 걷어 내려다 그만 자기 쪽 골네트로 차 버린 것. 2-1로 진 콜롬비아는 16강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당시 살해 배후에는 콜롬비아 승리에 거액의 판돈을 걸었던 ‘축구 마피아’가 있다는 설이 유력했다. 징역 43년형을 선고받았던 주범이 2005년 11년 복역 끝에 가석방되면서 배후설은 더욱 힘을 얻었다.

공 한 번 잘못 찼을 뿐인데 죽음이라니. 극단적인 사례지만 그만큼 자책골이 팬들에게 유발하는 실망감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페널티킥 실축도 자책골만큼 ‘죗값’이 무겁진 않다. 자책골은 영어로 ‘오운 골(own goal)’이라고 한다. 자기네 선수 책임으로 먹은 골이라는 뜻이다. 자책골은 한때 ‘자살골’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자책골을 넣은) 선수의 고통을 감안한다면 너무 심한 표현”이라는 지적에 따라 국내에선 80년대 후반부턴 자살골이라는 용어를 가급적 쓰지 않는다.

몸값 높은 선수들이라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건 아니다. 91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소속 리 딕슨이 코번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골은 ‘최악의 자책골’ 중 하나로 회자된다. 코번트리 골대 방향으로 공을 넘기려던 딕슨은 갑자기 등을 돌려 자기 편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하는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 문제는 그 골이 프리킥처럼 스핀을 잔뜩 먹인 탓에 자기네 골키퍼 키를 넘겨 버렸다는 점. 결국 아스널은 2-1로 패했다. 한 경기에서 자책골을 세 골이나 넣은 선수도 있다. 벨기에 주필러리그 95~96시즌 제르미날 대 안더레흐트의 경기에서 제르미날 소속 스탄 반 덴 바위스가 겪은 비운이었다. 듣기만 해도 심히 안쓰럽다.

자책골은 선수 본인의 자책감으로 이어진다. 자책감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기 십상이다.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박주영 선수가 자책골을 넣었다. 비난도 있지만 격려가 많이 쏟아지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라도나도 최근 루이뷔통 광고에 나와 “잘 해야 경기에서 이기는 거지, 페널티킥이나 자책골로 경기에서 이긴다는 건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국민 격려송’으로 불리는 ‘슈퍼스타’의 한 구절을 빌려 볼까. 주영아, 괜찮아 잘 될 거야. 23일 나이지리아와의 결전이 있잖아.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