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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면하려면 실세가 와야” “민심은 이번에도 야당 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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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 10면

6·2 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엔 은평을 출마를 희망하는 사람이 늘었다. 왼쪽부터 한광옥 상임고문, 정대철 상임고문, 장상 최고위원, 윤덕홍 최고위원, 이계안 전 의원, 고연호 은평을 지역위원장. 사진은 약 2만 명의 새 유권자가 입주한 은평뉴타운 전경. [중앙포토]

17일 오후 2시30분 은평구 구산사거리. 초여름 햇살이 따가웠다. 간판이 빼곡한 역세권 치곤 거리가 한산했다. 간간이 지나는 행인들의 표정도 한가로웠다.

지방선거 후 민심의 잣대, 7·28 재선거 은평을은 뜨겁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음 달 28일 치러지는 은평을 국회의원 재선거 때문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정권 ‘실세’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을 낙마시킨 주민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다음 달 재·보선이 열리는 곳은 모두 8군데다. 하지만 어느 곳보다 은평을이 재·보선 민심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민주당은 이재오 위원장을 다시 한번 낙마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지방선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승기를 굳히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나서 이재오를 꺾겠다’는 후보가 속출하고 있다. 당내에선 ‘공천받기가 어렵지 나가면 이긴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당 일각에선 거물급 인사가 나설 것이란 얘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구산사거리에서 연신내 쪽으로 향하다 보니 ‘은평 뉴타운 상담’이라고 써 붙인 한 부동산 중개업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이 위원장의 집에서 불과 10분 남짓 떨어진 곳이다. 이 중개업소 주인인 김모(52)씨는 “서울에 대학이 없는 구는 은평구밖에 없다”며 “은평이 찬밥 신세인데, 실세가 와야 은평구가 발전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그는 “선거가 바람을 많이 타니 이번에도 어느 당이 이길지 결과야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갈현동 역촌시장에서 자영업을 하는 40대 후반 박모씨도 “이명박 대통령이 됐으니 이재오가 미워도 찍어줬으면 은평이 좀 나아졌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만난 정모(38)씨는 “한나라당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민심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타나지 않았느냐”며 “이번 재·보선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은평 뉴타운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뉴타운이 들어선 진관동 주민들은 대부분 최근에 외지에서 이사 왔다. 은평을 유권자의 10%가량을 차지한다. 은평구 북쪽 끝에 있는 아파트 단지도 고요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와 있는 30대 주부 김모씨는 “어머, 선거 있는지 몰랐네”라더니 “누구든 별로 상관 없어요. 동네 잘되게 해 줄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이사한 지 한 달 됐다는 50대 남성은 “이재오는 한 게 없어서 안 됐다고 들었다. 그게 (이재오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라고 했다.

6·2 지방선거에서 은평구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서울시장·은평구청장·시의원·구의원·비례대표 선거 모두 한나라당을 이겼다. 서울시장의 경우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49.95%로 44.77%를 얻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를 5.18%포인트 앞섰다. 구청장 선거의 득표율은 더 벌어졌다. 민주당 김우영 후보가 한나라당 김도백 후보를 13.33%포인트 앞질렀다.

민주당은 예비 후보들의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내심 출마를 저울질하는 중량급 인사도 적지 않다.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는 후보가 10명이나 된다. 현재 선관위에 예비 후보 등록을 한 인사만도 장상 최고위원, 고연호 은평을 지역위원장, 최창환 전 이데일리 대표, 송미화 전 시의원 등 4명이다. 참여정부에서 교육 부총리를 지낸 윤덕홍 최고위원도 지난 10일 출마를 선언했다. 정대철·한광옥 상임고문도 출마를 위해 물밑에서 뛰고 있다. 은평을 민주당 지역위원장인 고연호 후보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나니 재선거 도 될 줄 알고 다 나오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은평은 낙하산에 대한 반대가 심하다”며 “장관·총리 다 필요 없고, 지역을 잘 알고 대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상 최고위원은 지난 3월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했다. 1월부터 지역을 다지며 적극적으로 재선거를 준비했지만 공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은평에 무슨 꿀단지가 있어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17일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상황이 이렇게 변하나…. 그래도 뿌린 씨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30~40대가 바람의 핵이다. 젊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꼭 이기라고 (격려)하는데 느낌이 좋다”고도 했다. 이어 “이재오 시대는 끝이다. 영원한 텃밭은 없다. 2004년 문국현에게 패배하면서 텃밭은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학규 고문의 출마설에 대해서는 “(나의) 정치 경력이 짧은 게 마이너스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정치에 발을 오래 담그지 않은 건 오히려 참신하다는 것을 얘기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윤덕홍 최고위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은평을 선거는 MB(이명박) 정권을 다시 심판하는 장이 될 것이다. 이재오는 MB 정권의 실질적 2인자이고,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장본인이다. 당의 명운을 걸고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재오 위원장의 표밭은 사실상 은평의 영남 출신 주민들”이라며 “승부를 겨뤄 내가 이기면 영남으로의 민주당 당세 확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구 출신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주당 대표를 지낸 한광옥 고문도 물밑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전주 출신인 그는 유권자의 30%가량을 차지하는 호남 출신 유권자를 파고들며 바닥을 다지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이재오 위원장이 나온다면 제1야당인 민주당이 거기에 걸맞은 후보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민주당의 정체성, 당에 대한 기여도, 상징성, 경쟁력 등을 감안하면 내가 나서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민주당 대표를 지낸 정대철 상임 고문도 출마를 염두에 두고 조용히 표밭을 다지고 있다. 정 고문은 6개월 전부터 주말이면 은평을 찾고 있다. 기독교 모태신앙인 그는 감리교 집사다. 일요일마다 은평 지역의 교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요일인 지난 13일에는 응암역 근처에 있는 은평교회에서 예배를 봤다. 그는 “시장 등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를)알아보더라. 내가 나가면 반드시 이재오 위원장을 꺾을 수 있다. 바닥(민심)이 좋다”고 자신감을 표했다.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패했던 이계안 전 의원도 최근 은평을 출마를 결심했다. 이 전 의원의 측근은 19일 “이 전 의원이 은평을에 나가 이재오 위원장을 꺾을 준비를 하고 있다”며 “현재 은평을에 나서겠다는 민주당 예비후보들은 노장 그룹이거나 지나치게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어서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참신한 이 전 의원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근태·손학규 고문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재오 대항마’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김 고문은 현재 도봉갑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어 운신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하지만 당이 전략 공천하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손 고문은 현재로선 은평을 재선거보다는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정세균 대표와 일합을 겨룰 것이란 얘기다. 한 측근은 은평을 출마에 대해 “거론된 바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내부 교통정리를 해야 할 민주당은 16일 7·28 재·보궐 선거 기획단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경 사무총장은 “은평을 공천에 대해선 누구를 공천할지 아니면 경선을 할지 등에 대해 정해진 바가 아직 없다”면서도 “(이재오 위원장 출마를 대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후보 난립인데 반해 한나라당은 아직 조용하다. 이재오 위원장은 여전히 출마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다. 16일 마감한 공천 신청엔 김영수 한나라당 상임전국위원만이 지원했다. 하지만 당에선 이 위원장이 추가 공천을 통해 출마를 공식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지난 17일 오후 이 위원장을 만났다. 마침 월드컵 한국-아르헨티나전이 있었다. 불광중학교에서 주민 응원전이 열렸다.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한국을 응원했다. 이 위원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오늘은 불광중학교 운동장에서 응원합니다. 반드시 이길 겁니다”란 메시지를 남기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는 운동장 가운데 주민들 틈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손녀를 앉히고 야광봉을 흔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정문으로 나가려는 그에게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했다. 기자도 다가가 물어봤다.

-출마하신다는데 언제쯤 직접 말씀하실 건가요.
“(한참 뜸을 들이며) 봐서.”

-주변에선 나오실 거라고 하던데요.
“아직 결심이 안 섰어.”

-민주당은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넘치는데요.
“그래…. 그쪽 결정되는 것도 보고….”

-이 위원장이 출마하면,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이 지역에 와서 열심히 돕겠다고 했는데.
“허허…. 당에서는 나오라고 하지.”

그는 이날 권익위 이동신문고 사업차 경기도 연천군을 방문해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묵히 돌파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 친이계 의원들은 사실상 그가 출마 의사를 밝힌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의 한 측근은 “상황이 어렵지만 여론조사도 잘 나오고 있으니 당을 위해선 직접 나서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며 “6월 말이나 7월 초에 (권익위) 사표를 내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번 재선거에서 승리해 여의도에 복귀하면 한나라당 내 역학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또 낙선하면 정치 생명은 치명상을 입는다. 지방선거의 결과가 여권에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정면승부를 선택해야 하는 이 위원장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의 핵심 측근도 “떨어질 가능성도 있고 이번에 안 되면 사망 선고다. 그렇지만 (이 위원장의) 스타일이나 소신으로 볼 때 어려워도 나가야지 피할 분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조한 정권이 위기를 맞았으니 결심을 굳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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