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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창 꺾고 철벽 방패로 변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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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새까만 밤하늘로 사라졌던 하얀 공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골키퍼와 1대 1이다. 공을 덮치려는 골키퍼를 가볍게 제쳤다. 이제 발만 갖다 대면 골이다. 순간,갑자기 골대가 사라졌다. 어디 갔지? 당황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갑자기 골키퍼가 나타나 공을 낚아채간다. 안 돼, 안돼….

"슛만 하려면 골대가 없어지는 거예요. 꿈인줄 알면서도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요."

지난해 24게임 무득점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부천SK의 스트라이커 곽경근.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지난해 여름부터 밤마다 골대가 사라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올시즌. 곽경근은 마지막 남은 길을 택했다. 수비수로 변신한 것이다.

곽경근을 스타 대열에 올려 놓은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중국과의 경기였다. 공격수로 나선 곽경근은 1골·1어시스트를 기록해 한국의 올림픽 본선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경기가 끝난 뒤 언론은 '제2의 최순호 탄생'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98년 부천SK 유니폼을 입을 때도 당연히 1순위에 지명됐고 그해 9골, 99년 13골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다.

그러나 최악의 해인 2001년.정규리그 24게임에서 단 한골도 넣지 못하면서 그의 이름은 급격히 퇴색했다.

"10경기를 마쳤는 데도 계속 골이 터지지 않으니 슬슬 초조해지더라구요."

답답한 마음에 수염도 길러보고 경기날 머리를 감지 않고 나가 봤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불면증과 악몽이 번갈아가며 그를 괴롭혔다. 경기에 출전하는 게 두려웠다. 경기 중 꿈에서처럼 정말 골대가 보이지 않아 아찔했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올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최윤겸 감독에게서 "수비로 뛸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정리해고돼 수비수로 내려올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아빠, 골 많이 넣어야 돼"하며 웃는 딸의 얼굴도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수비수로의 변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그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수비수 수업을 받았다.

수비수로 처음 출전한 지난달 24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그는 코칭스태프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제2의 축구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한 작가는 '인생은 다양한 비스킷이 들어 있는 깡통같은 것'이라고 했다. 깡통에 손을 넣어 꺼낸 비스킷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면 실망하지 말고 좋아하는 비스킷이 더 많이 깡통 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라는 얘기다.

지난해 곽경근의 인생은 맛없는 비스킷 부스러기 뿐이었다. 수비로 변신한 올시즌 그의 손에는 지난해에 아껴둔 맛있는 비스킷들이 넘쳐나지 않을까.

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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