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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8>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⑦ 미국에서의 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974년에 한국에서 추방된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는 민주당 시절 유엔 주재 한국대사로 활약하다 반정부 인사로 돌아선 뉴욕시립대 임창영 교수와 더불어 그해 말에 미국 CBS-TV를 통해 30분간 한국의 실정을 폭로하겠다고 나섰다.

반한감정이 한창 고조되던 때라 미국 CBS로서는 놓치기 아까운 기사였다. 그래도 CBS측에서는 일방의 주장만을 들을 수는 없다며 주미 한국대사관에 반대쪽 인사를 천거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는 81년 비서실장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수행했다가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은 함병춘씨였고, 그가 국내에 인물 물색을 요청했던 상대는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이었다.

김회장으로서는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에 내가 1개월 가량 미국 전역을 돌며 느낀 반한(反韓)기류를 아세아방송을 통해 전하는 것을 김회장이 들었던 터였다.

함대사와는 그전부터 알고 지냈으나 김회장과는 얼굴 정도 아는 사이였다.

75년 1월 하순에 나는 김회장·김익준 전 유정회의원 등과 워싱턴으로 향했다. 1차적 목적은 제32회 종교방송인대회(NRB)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는 곳마다 한국의 실상을 알릴 기회를 잡으려고 애썼다. 한국의 종교와 사회 상황은 내가, 경제 상황은 김회장이, 정치 상황은 김전의원이 맡았다.

나흘간 계속된 종교방송인대회의 마지막 날 나는 한국에서 40여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쉬고 있던 엘미 킬본 선교사와 함께 뉴욕 CBS-TV의 존 챈슬러가 진행하는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상대는 역시 임창영 교수와 오글 목사였다.

CBS는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30초 가량 명동성당 앞의 시위대를 경찰이 저지하는 장면 등을 내보냈다. 나와 킬본 선교사에게 명백히 불리한 좌담이었다.

임교수는 "재미 동포의 97%가 현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한다"고 주장했고, 오글 목사는 "한국엔 목사들 대부분이 반정부 인물이라서 종교탄압이 심하다"고 비난했다.

나는 이렇게 맞섰다.

"작년 12월을 전후해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에서 설교를 했고 지난주에는 워싱턴에서 집회를 했지만 설교를 들은 동포 가운데 반정부 동포는 97%는커녕 3%도 안됐습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목사들은 순수한 복음을 전파할 때는 탄압받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3백20여만 명이 모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가 어떻게 열릴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한국에 복음 방송사를 세우면서 정부 인사들과 군장성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라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설전은 계속됐지만, 정치는 몰라도 적어도 순수복음을 전파할 때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을 그들이 엎지는 못했다.

오글 목사는 그후 99년에 국내 단체의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으나 그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대담을 마친 후 우리가 주최한 만찬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참모들이 참석해 73년에 열렸던 여의도광장 전도대회에 관해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전에도 나는 미국에 가면 함병춘 대사를 가끔 만났다. 목사의 아들인 그와는 국내에서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언젠가 나를 만나자 그는 반한 내용이 담긴 1천여통의 편지를 풀어보이며 "정권 차원을 넘어서 국가 차원에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미국 정치인을 만나는 나를 건전하지 못한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함대사는 대사로서는 미국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선 의회를 움직이려면 먼저 유권자를 움직여야 하고, 유권자를 움직이려면 유명 목사를 움직여야 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게 미국을 돌고 한국에 돌아오니 청와대로부터 격려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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