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7>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⑥ 그레이엄 전도대회 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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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를 거치면서 나는 이런 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여러차례 들었다.

첫날 대회가 끝나자 일간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다. 그런데 그 대상이 당연히 그레이엄 목사여야 할텐데 엉뚱하게도 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잘 나지도 못한 주제에 대회를 끝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미리 고민해야 할 형편이었다.

궁리 끝에 나는 공군병원 박경화 원장에게 병실을 하나 부탁했다.

"목사님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인터뷰하자고 해서 당분간 피하려고요."

"아니, 이 기회에 유명해지면 좋지 않습니까?"

"오늘 있다가도 내일 없어지는 게 인기입니다. 목사가 명예욕을 갖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가 떠나고 병실에서 푹 쉬면서 아내에게만 나의 행방을 알렸다. 아내의 이 한마디는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나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이런 때일수록 겸손한 마음을 가지세요."

1주일 후 수원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명해져 있었다. 미국 교회들이 초빙하고 싶어 하는 유명강사 명단에 이미 올라 있었다. 방송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었다.

그러나 모교인 밥존스대학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총장이었던 밥 존스 3세는 1973년 6월 22일자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밥존스 대학교와 가졌던 모든 관계를 지우고 밥존스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미국에 기금을 모으러 올 때도 밥존스 대학에 들를 생각일랑 아예 마시오. 당신은 이제 우리의 가족이 아닙니다,"

내 이름은 동창회 명부에서 지워졌고, 밥존스 출신 후원자들은 선교비 지원을 중단했다. 그날 이후로 밥존스 대학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후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밥존스 출신 중에 빌리 그레이엄과 빌리 김을 모르는 학생은 없다고 한다.

그때 그레이엄 목사가 미국에서 보내 준 편지는 큰 위안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신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대회 후 몇몇 친구들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 유감입니다. 미국에 오시면 전화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그레이엄 목사는 국내 기독교계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만나고 싶은 인물 1순위에 올랐다. 아이젠하워에서부터 제럴드 포드까지, 미국의 대통령은 그레이엄과 핫라인을 설치해놓고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마다 조언을 듣고 기도를 요청했으니 우리 정치인들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레이엄 목사의 한국대회를 허가하기 전에 청와대에서 윤치영 공화당 의장을 통해 그레이엄 관련자료를 요구한 것으로 보아 박정희 대통령도 그때만 해도 그의 '위력'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현 자민련 총재는 그레이엄 목사의 영향력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회기간에 유럽 순방 중이었던 김총리는 그해 7월 그레이엄에게 편지를 띄웠다.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설교를 테이프로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민과 한국민 사이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목사님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김총리는 미국 내 반한(反韓)기류를 언급했고 편지 말미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달 미국을 찾을 김장환 목사를 통해 듣게 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그때 유신에 대한 반감이 큰 데다 1954년부터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펴왔던 조지 오글 목사가 유신반대 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터라 한국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빴다. 그 오글목사는 99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한국을 찾아 언론의 조명을 받았었다.

이리하여 나는 좋게 말하면 애국적인 활동에, 나쁘게 말하면 정치판에도 간접적으로 얽혀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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