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서보·김명숙의 상반된 예술관 "내 작품은 불멸" "난 소멸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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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자신의 작품이 앞으로 부스러져 없어져도 좋다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헌데 그런 작가가 있다. 서울 소격동 금산갤러리에서 초대전(24일까지)을 열고 있는 김명숙(42)씨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얼굴과 깊고 어두운 숲을 절박한 필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영혼을 뒤흔드는 울림을 준다.(본지 3월 15일자 48면)

문제는 재료가 막종이라는 점이다. 사진 촬영을 할때 뒷 배경을 가리기 위해 쓰는 대형 두루마리 종이다. 값이 싸기 때문에 미국의 미대생들이 드로잉을 할 때 애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몇십년만 지나도 자체의 화학약품에 변질되고 부스러지기 쉬운 재질이다. "좀더 좋은 재료를 써야 하지 않습니까?"답이 뜻밖이다. "그럴 가치가 없어요."이유는?"미술사에 남을 작품은 몇백년이라도 보존돼야겠지요. 나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그리는가? "그림은 내게 상처와 어둠을 견디게 해줍니다. 이미 보상을 받은 셈이지요."

인근 갤러리 현대에서 초대전(4월7일까지)을 열고있는 박서보(71)화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한국 추상회화의 대부로 꼽히는 그의 묘법 연작을 시기별로 망라한 전시다(17일자 23면). 그의 재료는 한지 12겹이다.

작가는 "'비단은 5백년을 가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 말처럼 보존성은 걱정 없습니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다.

그는 1998년엔 30호 크기의 작품 3점을 세라믹(도자기)으로 복제했다. 일본의 전문 기업에서 실물과 판별이 되지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야외에서 몇천년간 비바람을 맞아도 흠하나 생기지 않는 재질이 세라믹이지요." 자신의 작품이 미술사에 불멸로 남으리라는 확신을 드러내는 말투다.

중견 김명숙씨와 원로 박서보씨의 자기평가는 이처럼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양쪽 모두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는 예술혼의 표현이란 점에서는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도 화랑관계자들은 김명숙씨가 두루마리 종이를 오래가는 좋은 재료로 바꾸기를, 그래서 좋은 작품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바란다. 설사 그의 자기평가가 옳다고 해도 혹시 아는가. 나중에 대가로 성장해 젊은 시절의 작품도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게 될지.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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