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 같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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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리핀에 사흘간 머물다 18일 입국한 탈북자 25명은 환하게 웃었다.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지난 14일부터 겪어야 했던 극도의 불안감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표정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적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한국이 낫다고 생각해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중국·한국 분들처럼 앞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오후 5시50분쯤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 어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고아 소녀 김향(15)양은 이렇게 소감을 밝히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반갑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이들은 "자유로운 세상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이루 형용할 수 없이 기쁘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두고 왔다는 이성(43)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들이 보고 싶지만 통일이 될 때까지는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말해 잠시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들은 귀빈 전용 통로를 통해 입국수속을 밟은 뒤 여객청사 동편 귀빈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45인승 버스편으로 서울로 출발했다.

인천공항은 오전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항경찰대와 공항경비대의 삼엄한 경계가 이어졌지만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이들을 태운 대한항공 622편은 예정보다 25분 늦은 오후 1시5분(한국시간 2시5분)쯤 마닐라 니노이아키노 국제공항을 출발, 오후 5시21분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일반 승객들이 먼저 내린 뒤 공항 여객터미널 2층 9번 게이트를 통해 나온 탈북자들은 긴 여정에 지친 듯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시민들에게 자주 손을 흔들면서 기쁨을 나타냈다.

함께 항공기를 타고온 여승무원 오주연씨는 "비행에 익숙지 않은 듯 몇몇분이 두통을 호소했지만 기내식을 모두 비울 정도로 건강이 괜찮았다"며 "일부는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번 탈북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박사는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탈북자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폴러첸 박사는 "정부가 햇볕정책을 펴면서도 탈북자 실태를 쉬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탈북자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중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하기 전날 베이징에서 이들을 만났던 피납탈북자인권연대 도희윤 대변인은 탈북자 중 이선애(16)양이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자 "서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한편 탈북자 관련 시민단체 회원 20여명은 '중국은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인도적 망명을 허용하라'는 등의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여객청사 1층 입국장을 누볐다.이들은 탈북자들과 만나기 위해 공항 주차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다 저지하는 공항 관계자들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김창우·정용환·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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