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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의 힘에 대한 믿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 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예일대학의 토빈이 타계했다. 크루그먼은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전제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지지를 받는 나쁜 아이디어가 활개치는 시대에 토빈이 가졌던 좋은 '아이디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2월에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페루츠의 부음도 전해졌다. X선 회절법을 단백질의 분자구조 결정에 적용하여 극히 복잡한 생체분자인 헤모글로빈 구조를 밝혔을 뿐 아니라, 왓슨과 크릭이 생명의 기본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사용한 기반기술을 제공한 사람이다. 과학잡지 네이처는 페루츠의 성공 뒤에 있었던 영국 케븐디시 연구소의 장기적인 연구에 대한 후원을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경쟁적인 연구풍토에서는 20여년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던 페루츠가 노벨상을 받는 업적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뜻이다.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따준 브래그, 영국 의학연구위원회(MRC)의 멜란비 같은 분들의 뒷받침과 이러한 분들이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서 그는 성공할 수 있었고,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에 대비되는 최고의 MRC 연구소들을 설립하여 영국 생명과학의 기초를 다지는 큰 기여를 하게된다.

『뷰티풀 마인드』 라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내시의 자서전을 보면 상을 받게 된 업적을 이룬 프린스턴대학의 역사가 소개된다.이 대학은 20세기 최고의 천재로 불리는 폰 노이만을 위시하여 아인슈타인·괴델·베일·위그너 등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될 거물 학자들을 유럽에서 불러왔는데, 그 비용은 '과학을 진흥하지 못하는 국가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라는 모토 아래 활동한 록펠러 재단이 부담하였다. 재단이사인 철학자 로즈는 엄청난 봉급을 미끼로 이들을 설득하여 '마호메트를 산으로 보내기(공부하게) 보다 산을 아예 옮겨오는' 사업을 성공시켰다. 프린스턴에 이론물리학의 메카가 된 고등학술연구원을 설립하기까지에는 밤버거란 사업가의 재산 기증과 수학에 이 돈을 쓰도록 한 의학교육자 플렉스너의 공이 있었다. 이런 연구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내시와 같은 미국의 영재들을 넉넉한 장학금으로 불러모아, 폰 노이만 등과 부닥치게 한 것이다.

21세의 젊은 나이로 고등학술연구원에서 핵물리 연구에 참가한 코완은 이후 핵무기 개발을 담당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장을 거쳐, 87년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머리 겔만, 경제학자 앤더슨·애로 등과 샌타 페이 연구소를 설립한다. 로스 알라모스와 가까운 곳에 세운 이 연구소는 프린스턴의 아이디어가 재현된 듯한데 21세기 과학의 핵심인 복잡성의 과학을 탄생시켰다. 왈드롭의 '복잡계에서 인공생명으로'는 미국이 80년대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패배를 겪으며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시티그룹의 리드 등을 설득, 이 연구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결과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열악한 사정을 생각하면 프린스턴이나 샌타 페이 연구소를 부러워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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