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옛 관문… 동·서양 아우른 볼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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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도시인은 늘 일탈을 꿈꾼다.

어깨선을 따라 켜켜이 쌓인 피로와 하루하루 쫓기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도시인의 오랜 꿈은 그러나 꿈에 머물기 일쑤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행장(行裝)을 꾸리고 어디든지 훌훌 떠나려는 현대인을 붙잡는 것은 시간도 돈도 아니다.

따분한 일상을 떨치고 싶은 욕망만큼 여행길 곳곳에서 마주쳐야 하는 '낯선 것'을 은근히 싫어한다. 낯선 것에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 고단함과 수고가 사실은 귀찮고 두려운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의 짧은 여행은 낯설고도 익숙한 일탈이다.

1시간20분의 짧은 비행. 비디오 한편이 채 돌지도 못하는 시간에 비행기는 나가사키 공항에 내린다. 공항주위를 둘러싼 야트막한 산자락의 완만한 곡선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남녘의 어느 항구 도시를 떠올릴 만큼 익숙하게 다가온다.

나가사키는 일본 열도 4대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九州)북서부에 자리잡은 인구 40만의 중소 항구도시다. 동중국해를 향해 뱃길이 환히 열려 있어 예부터 한국과 중국은 물론 멀리 유럽으로 통하는 일본의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히로시마(廣島)와 함께 세계에서 두 곳뿐인 원자폭탄 투하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요충지였다. 애초의 투하 목표였던 인근 사세보(佐世保)항이 구름에 가리운 바람에 대신 '원폭의 비극'을 겪은 불운의 도시다.

그래서인지 원폭 평화공원 입구에 서있는 평화기원상은 어딘가 서글퍼 보이지만 시(市)당국은 과거의 상처를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바꿔 놓았다.

원폭 평화공원 등 시내 곳곳이 외국인을 위한 관광 코스로 꾸며져 있다. 50여년 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던 피폭지-나가사키를 영낙없는 관광 도시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일본인의 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더욱이 17~18세기 에도(江戶)막부시대 일본 유일의 해외 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시내 곳곳에 숨어있는 동·서 문화의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둘 눈에 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19세기 상인 토마스 그로버의 서양식 저택이 그대로 복원된 구라바 엔(園)과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인공섬 데지마(出島)등을 둘러보면 유럽의 한 도시를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중국 문화의 흔적도 곳곳에 숨어 있다.중국음식으로 알고 있는 짬뽕의 원산지가 바로 여기다. 나가사키 인근 해안에서 건져 올린 갖가지 해산물을 국수에 말아먹던 향토 음식이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을 통해 대륙으로 건너갔다고 이곳 사람들은 전했다.

중국인들이 해외에 유일하게 만들었다는 공자묘(廟)에서는 해마다 9월이 되면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바로 옆에 있는 중국 역대박물관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관에서 빌려온 고대 중국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일본의 첫번째 국립공원이라는 운젠(雲仙)국립공원. 나가사키에서 열차로 2시간 거리인 운젠 온천지대는 나가사키 여행이 가져다주는 권태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새벽 산안개와 유황천 증기가 어우러진 해뜰녘 운젠의 신비로운 풍광은 이곳이 '구름속 신선'(雲仙)이라 불리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해발 1천m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즐기는 노천욕도 그만이지만 인근 해안지대인 시마바라(島原)와 오바마(小)에서 바다를 내다보며 즐기는 온천 해수욕도 일품이다. 바닷물 속에서 솟구치는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시마바라에서는 일출을, 오바마에서는 일몰을 즐길 수 있다.

나가사키 여행은 이처럼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도시인이나 한가로이 휴가를 즐기려는 가족들이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낯설고도 편안한 일탈이다.

나가사키=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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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두차례(월·토요일) 대한항공이 직항편을 운항한다. 공항에서는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버스가 5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호텔을 이용할 때는 다다미 방에서 한번 숙박해 볼 것을 권한다. 다다미 방에서 생활하는 경험 자체도 재미이지만 침대가 없는 다다미 방은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종업원이 들어와 방 한복판의 차()테이블을 치우고 잠자리를 봐주는 색다른 대접도 받는다. 호텔 내부 온천탕을 이용할 때의 주의사항.반드시 남·여탕 구분 깃발을 확인하고 들어가야 한다.대부분의 호텔이 날마다 남녀탕의 위치를 바꾼다. 어떤 호텔은 조석으로 바꾸기도 한다. 자세한 정보는 나가사키현(縣) 서울사무소(02-399-2190)를 통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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