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몰상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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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나일강의 범람을 대하듯이 현대 세계는 경기 변동을 대한다. 이 현상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그것은 모두에게 아주 중요하며, 그리고 그 본래의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1898년 '현대에' 미국 경제학자 존 클라크는 이렇게 썼었다.나는 그 통찰이 2002년의 현대에도 제법 유효할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경기가 살아난다는 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이래 사경을 헤매던 경기는 한때 종합주가지수를 1000대로 밀어 올릴 만큼 기운을 되찾은 듯했었다. 외자의 국내 증시 '고지' 점령과 '바이 코리아' 따위의 선동에 힘입은 1999년 하반기의 이 반짝 경기는 곧 '거품'으로 스러졌다. 아랫목이 따뜻하면 윗목도 따뜻하게 되리라던 약속도 공수표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이다. 중소기업에 일이 몰리고 공단이 바쁘게 돌아가 '윗목'에도 냉기가 가신다는 것이다. 기업의 체감온도를 알려주는 올해 2분기의 기업실사지수(BSI)는 133으로 1분기에 비해 무려 53포인트나 뛰었다. 이 지수 작성 이래 최고의 상승 폭이라니 수치만으로는 급성 고열을 걱정하게 생겼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반열의 경제쯤 되면 성장의 장애는 공급 요인보다 수요 부진에서 오기 쉽다. 그 수요를 구성하는 거시지표가 소비·투자·정부지출·수출이다. IMF 치하에서 우리가 들은 훈시의 하나는 절약이 미덕이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소비가 나라 경제를 살린다는 '애국' 설교에다 유사 이래 처음 보는 '저금리' 멍석까지 깔려, 모처럼 만난 호기에 흔전만전 쓰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급기야 정부가 나서서 가계대출 자제를 은행에 요청할 만큼 내수는 전천후 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납작 움츠렸던 기업의 설비투자는 이제 겨우 기지개 켜는 수준이지만, 불경기 터널에서 벗어났다는 확신만 서면 투자심리는 경쟁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경기 진작 차원에서 이모저모 규제를 풀었던 건설투자 역시 정부의 투기 규제조치를 다시 부를 만큼 부분적으로 과열 양상마저 빚고 있다. 여전히 고전 중인 수출에도 최근 엔화 절하 속도의 감소, 미국 경제의 회복 등 낭보가 없지 않다. 주력품목 반도체 매기가 반등하고 자동차 수출이 호조를 보여 관련 부문에 대한 '햇볕' 역할이 기대된다. 이렇게 소비와 투자가 청신호를 보내고 수출 역시 적신호는 아니라면 당분간 경기는 나머지 하나의 지표, 즉 정부지출에 달린 셈이다.

정부의 경기 조절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우선 소비와 투자와 수출에는 정부의 결정이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 소비에는 가계가, 투자에는 기업이, 수출에는 해외라는 수요 주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지출은 정부가 임의로 결정한다. 돈이 모자라면 국채 발행을 통해서라도 쓰고 싶은 만큼 쓰기 때문이다. 쓸 데를 먼저 정하고 걷을 것을 나중에 요량하는 유일의 경제 주체가 정부다. 정부 지출은 또 집권세력의 이해를 긴밀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인' 지출이다. 어떤 정부도 선거를 앞두고 지출을 줄여서 표를 떨어뜨리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다. 이런 관찰이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치를 2002년의 한국 경제에도 예외가 아니라면, 즉 민간수요와 해외수요의 회복 조짐에다 선거를 겨냥한 정부수요까지 확대 일변도로 달린다면 우리는 언 발에 뭐 하는 '반짝 경기'의 실수를 다시 저지르게 된다. 예산의 조기 집행, 각종 연금과 기금의 주식 투자 확대 등 도처에 그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나일강의 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질서의 산물이지만, 선거 뒤의 인플레이션 보복은 누구에게도 보이는 정부 정책의 소산이다.

이제 막 되살아나려는 경기에 찬물을 뿌리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 경기의 향배, 구조조정 지연, 과도한 집단 이기주의 등 회복의 발목을 잡을 복병이 도처에 널려 있다. 거시지표의 온기에도 불구하고 미시지표는 여전히 냉기일 수 있으며, 지금이 과열을 걱정할 때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여태껏 경기가 나빴으니 앞으로 좋아질 것이란 예상이 상식이라면, '선거 선심'이 없더라도 올해는 경기가 나아질 것이란 전망 역시 상식이다. 문제는 자연히 좋아질 것을 더 빨리 더 크게 좋아지게 하려는 '과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몰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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