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0>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⑭ YS 재가 떨어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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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997년 11월 14일 강경식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오전 8시15분부터 청와대 2층 집무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날 관계기관 회의를 열어 결정한 금융외환 종합대책을 보고했다.

김용태 비서실장과 내가 배석했다.

원래 이 시간은 비서실장의 일일 보고시간이었다.

대통령 일정상 다른 시간을 낼 수 없었고 보안유지의 장점도 있었기에 사안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金실장에게 설명하고 그의 양해를 얻어 金실장의 보고시간을 이용한 것이었고, 자연히 경제부총리의 다른 보고 때와는 달리 金실장도 나와 같이 배석하게 됐다.

그 뒤 IMF행과 관련한 두번의 보고도 이 시간에 하게 된다.

姜부총리는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대폭 확충하고, 모든 금융기관의 예금을 3년간 보장하고, 부실 판정을 받은 금융기관은 강제 정리하는 한편, 외환보유액과 장·단기 외채를 국제 기준으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일찍이 시행하지 않았던 금융산업구조조정에 관한 강력한 종합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IMF행'이었다.

"종합대책과 함께 다각적인 자금대책을 강구했습니다만 여의치 않습니다. 이제 IMF에 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IMF와 협의를 추진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姜부총리는 금융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이런 내용을 종합해서 발표하겠다고 보고했다.

"알겠소. 그대로 추진하시오."

金대통령은 담담하게 IMF행을 재가했다.

姜부총리는 전날 밤 회의에서 의견을 모은 대로 IMF행의 정치적 부담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각하, 각하께서 재임 중 아무리 잘하셨더라도 각하의 경제치적은 IMF가는 걸로 끝날 겁니다. 문민정부의 경제는 IMF구제금융으로 마감됐다고 평가받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 겁니다."

그러나 金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즉시 IMF와의 협의를 시작하시오."

보고를 마친 뒤 대기실로 나온 姜부총리와 李총재, 그리고 나는 한 목소리로 "대통령께서 바로 재가해주셔서 다행이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전날 저녁 회의에서 막상 IMF행을 결정하고 난 뒤부터 나는 오히려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정치적 고려로 IMF행을 재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고, 姜부총리와 李총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뒷날 항간에는 金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IMF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金대통령 입장을 생각하면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는 어떻게든 IMF에 가는 것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이 상식일지 모르지만, 金대통령은 일절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나는 당시 金대통령이 IMF에 감으로써 안게 되는 정치적 부담의 실체를 실감했는지 의문스러웠다.

金대통령은 뒷날 검찰총장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이 대목에 대해 "IMF 지원금융을 받지 않고는 머지않아 국가부도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선 어떠한 정치적 부담이 있다 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어쨌든 대통령의 IMF행 재가는 떨어졌고, 남은 것은 IMF와의 본격적인 협의였다.

姜부총리는 李총재와 내 앞에서 "캉드쉬 총재가 빨리 서울로 오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김기환 경제협력 특별대사에게 어제 연락을 했는데, 또 연락해야겠다"고 말했다.

이 무렵 金대사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관련 포럼에 참석하고 있었고, 姜부총리는 전날 金대사에게 캉드쉬 총재와 만나 그의 방한(訪韓)문제를 협의해줄 것을 지시해놓았다.

姜부총리와 李총재를 배웅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내 마음은 착잡했다.

'그간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IMF에 가게 되는구나' -.

경제팀으로선 최선을 다해 일찍이 없었던 획기적이고 종합적인 위기대책을 마련했건만,정작 그 대책의 효과를 지켜보지 못하다니. IMF외의 다른 대안을 찾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고, 그때 국제금융계는 한국편이 아니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됐을까.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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