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규제보다 무서운 건 공급과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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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해 말부터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우리 철강업계가 다시 악재를 만났다. 미 정부의 수입규제조치가 비록 직격탄은 아니라도 세계 철강시장에 미치는 파장은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철강업계의 대부로서 민영화 완료와 함께 21세기의 젊은 혁신형 철강업체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는 포항제철(POSCO)의 유상부(常夫)회장은 "지금이야말로 더 변화의 속도를 낼때"라고 말했다.

-미국의 조치가 예상보다 강력한데요.

"우리 업계는 그간 미국의 조치에 대해 충분히 예측하고 대처해 왔습니다. 대미 수출이 다소 위축되기는 하겠지만 수출 금액 기준으로 미국은 일본·중국·동남아에 이어 네번째 시장이어서 우리보다는 유럽쪽이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철강업계의 가장 큰 고민은 세계적인 시설·공급 과잉입니다. 수요는 연간 약 8억4천만t인데 공급은 10억4천만t이나 됩니다. 때문에 세계 어느 업체든지 살아남기 위해 통합과 전략적 제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일본제철과 지분제휴 관계에 있지요."

-이번 조치가 한·중·일 3국의 철강협력에 영향을 줄 수 있겠지요.

"세계적인 지역경제 블록화추세를 주시하고 있는 동북아 국가, 특히 3국엔 협력을 가속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판단됩니다. 특히 협력의 역사가 깊은 철강부문은 더욱 그렇습니다. 당장은 일본 업계가 한창 구조조정 중에 있어 어렵습니다만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엔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이런 불투명한 환경 속에 포철은 어떻게 '선택과 집중'을 해나갈 계획입니까.

"중기경영전략으로 2006년까지 10조7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인데 이중 95%를 철강 부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업은 역시 철강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여 나머지 5%를 에너지·정보기술·생명공학 등에 투자할 겁니다.

특히 에너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최대 강점 중의 하나인 만큼 예컨대 한국전력 발전사업 부문 인수 등을 적극 추진할 계획입니다. 경영 다각화는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습니다만 포철은 철강을 기반으로 한 핵심역량을 이용해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방식입니다.

-포철이 '영거 포스코(Younger POSCO)'를 내걸고 변신 중인데요. 얼마 전 고위급 인사에서도 약간 비춰졌지만 오는 15일 주주총회에서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33년 역사를 지닌 포철 직원의 평균 연령이 40세가 넘어 인사적체가 심합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과장급 이상 간부 인력을 매년 5%(1백명 안팎)씩 감축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56세 정년보장이라는 인사정책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향후 포철을 이끌고 갈 후계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후계자는 나이나 서열을 감안하지 않을 겁니다. 건전한 기업윤리 의식과 전문성·책임감이 있는 사람 4~5명을 뽑아 집중적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바뀐 포철의 첫 CEO로서 어려움은 없는지요.

"성공한 기업은 바꾸기를 싫어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많지요. 포철도 놔두면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 1999년부터 사고혁신과 고객지향이란 두 목표를 갖고 업무혁신(PI)을 시작했습니다.1단계가 마무리되고 현재 2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지금까지 2천억원을 들여 3천2백억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냈습니다.

비용을 줄인 것도 중요하지만 전 직원에 대한 무형의 교육효과가 더 크다고 봅니다.

PI를 다시 말하면 전형적인 굴뚝산업에 온라인을 접목해 시너지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포철은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데다 독점 제품을 생산해 의사결정이 고객중심이 아닌 생산자 중심이었습니다. 현재 어느 정도 이런 문제가 개선됐으나 과거로 회귀하려는 'U턴현상'도 있어 지속적인 추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에서의 포철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인데요.

"기업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곧 포철의 투명경영 성과가 시장에서 인정을 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난해는 철강업계 최악의 침체 속에서도 이익을 냈고, 올 하반기부터는 철강 경기가 본격 회복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늘 지적되고 있는 냉연코일 생산과잉 문제에 대해선 어떤 생각인지요.

"포철은 현재 6개의 냉연공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시설이 남아 지난해 6개 중 평균 1.5개 꼴로 가동을 중단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현대하이스코가 1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각자 생존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올해 대선 등을 앞두고 벌써부터 포철에 정치적 외풍이 불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요.

"아직도 포철을 국영기업으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부가 포철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포철은 외국인 지분이 62%나 됩니다. 일부에선 주인이 없는 것도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포철경영은 어항 속의 붕어같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투명하게 경영해 신뢰를 높이면 이런 우려가 사라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대담=곽재원 산업부장

사진=안성식·정리=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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