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체 간부 2명 "규제개혁기획단 100일 일해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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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실 산하 규제개혁기획단은 지난 8월 27일 출범했다. 2년간 활동하는 한시 조직이다. 지난 5일 100일째를 맞았다. 공무원 26명과 대기업.민간연구소 관계자 25명 등 51명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삼성.현대.LG.롯데 등 10개 대기업에서 파견된 부장.차장급 10명이 상주하며 실무를 맡고 있다. 기획단은 총 12개 분야 60개 과제를 연구 대상에 올려놨다.

# 1 "지난 9월 건축 허가 과정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한 광역시에서 현장 조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할인점 건축 허가를 앞두고 시가 해당 기업에 '교통 혼잡이 우려되니 할인점 앞 땅을 도로로 만들어 시에 기부하라'고 요구했어요. 허가 조건이었죠. 이게 소문이 나니까 땅 주인이 안 팔고 버텼어요. 결국 기업은 10평을 시세보다 6배 비싼 3억원에 매입했어요. 해당 공무원에게 '왜 기업이 바가지를 쓰도록 방치했느냐, 도시계획상 도로 부지임을 알려주면서 땅 주인의 무리한 요구를 무마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러면 기업에 대한 특혜입니다'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말문이 콱 막혔어요."(장영태 위원)

# 2 "제조업체는 원가로 산업부지를 분양받는데 물류업체는 원가보다 비싼 시세로 사들여야 했던 적이 있었어요. 이에 물류업체에서 민원을 제기해 2001년 관련 법이 개정됐어요. '물류업체도 원가에 분양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간 거죠. 그런데 최근 현장을 조사해 보니 이게 적용된 사례가 없더라고요. 법 조항을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로 해놓으니까 일선 공무원이 아예 안 해도 되는 걸로 생각한 것 같아요. 홍보도 안 하고…."(나창엽 위원)

총리실 산하 규제개혁기획단(이하 기획단)의 장영태(46).나창엽(49)전문위원이 겪은 지방 행정의 문제점이다. 이들은 8월 27일 기획단이 출범할 때 2년 임기로 파견 나온 기업체 출신 전문위원(총 10명)이다. 장 위원은 롯데그룹 유통 분야에서 18년간, 나 위원은 대한항공 물류 분야에서 17년간 근무해온 부장급 간부다. 파견 직전엔 각자의 회사에서 상품3부문장과 화주판매팀 부장으로 일했다. 이들은 공무원과 함께 불필요한 기업 규제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막상 와서 보니 열심히 일하고 열린 사고를 하는 공무원도 많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지자체와 중앙부처 모두 개선할 점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혹여 우리 얘기가 기업 이기주의로 비칠까봐 조심스럽다"면서도 지난 100여일 동안 '기업체 간부'의 눈으로 본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소개했다.

"얼마 전 도심 외곽의 녹지지역에 대형 할인점 입주를 허용하는 문제를 놓고 건설교통부 측과 협의했어요. 건교부는 '마구잡이 개발 방지'라는 명목만 들어 무조건 반대하더군요." 장 위원은 "어떻게든 함께 문제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고 했다.

그는 "중앙공무원이 현장을 너무 모른다"면서 "'이러한 불합리한 사례가 있다'고 얘기하면 '그런 거 없다'고 하다 증거를 제시하면 그제야 '그런 게 있었네요'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나 위원은 "공장 입지 규제 완화 등 민감한 사안을 얘기하면 해당 부처에서는 부작용만 얘기하지,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아예 '안 돼' 하고는 대화를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기획단 내부의 고충도 털어놓았다. 너무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바라는 시선이 부담이라고 했다.

나 위원은 "그동안 1200건이 넘는 각종 제안을 심사해 해당 부처에 넘기는 작업을 하고, 과제를 발굴하느라 야근을 수없이 했다"며 "하지만 충분한 검토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고 털어놨다. 그는 "위에서는 기업의 건의 사항을 빠짐없이 올리라는데도 우리 같은 실무선에서 자기 기준대로 자르고 빼버리는 경우가 많더라"고 덧붙였다.

장 위원도 "실무진에서 확신을 갖고 대책을 올려도 윗선으로 올라가고, 또 부처 협의를 거치면서 알맹이가 자꾸 빠지더라"면서 "너무 합의만을 의식하면 정책 본질이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부 공무원의 안이한 자세를 지적하는 말도 나왔다. 장 위원은 "국민이 행정절차를 밟으면서 힘들고 돈이 많이 든다면 그것을 만든 공무원은 미안해하고 또 '뭐가 잘못돼서 그런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법을 만든 뒤에는 반드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나 위원은 "업계 건의를 기업 이기주의로만 생각해 실무진에서 잘라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타당성이 있는 것은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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