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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 시대 따라 달라진 간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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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간첩이 다시 우리 곁에 등장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의 감격 속에 파묻혀 버린 간첩이란 단어가 4년여 만에 되살아난 것이다.

북한 군부의 정보기관은 지난 5월 탈북자 이모(28)씨를 밀봉교육을 받게 한 뒤 남한 사회에 침투시켰다. 정상회담 이후 소식을 듣기 어렵던 북한의 간첩 대남 침투 활동이 탈북자를 이용하는 새로운 유형으로 바뀐 게 확인된 것이다. 게다가 국회에서는 1992년 불거졌던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됐던 한 여당 의원의 전력을 둘러싸고 여야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특징은 '과거의 간첩'과 '현재의 간첩'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다. 과거의 간첩 이미지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고무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침투해 라디오 단파로 지령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간첩은 위조 여권을 갖고 비행기를 타고 들어온다. 탈북자로 위장해 입국 후 주민등록증과 정착금.영구임대주택을 제공받는다. 상부와의 통신은 PC방에서 행해진다. '간첩 업그레이드'시대다.

간첩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나 이를 다루는 정부의 태도는 과거와 확 달라졌다. 북한이 탈북자 공작원을 침투시켰다는 보도에 대해 네티즌들은 뜨거운 논전을 벌인다. 충격적이란 의견도 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저지하려는 보수층의 음모"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심지어 조작설도 나온다. 일단 간첩사건이 발표되면 다른 목소리는 침묵하던 90년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당국자는 10일 "간첩이 체제에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주목하기보다 정권에 대한 지지나 반대 등을 간첩사건을 보는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탈북자 사건 수사 결과를 관계당국은 공표하지 않았다. "피의 사실 공표 금지조항 때문"이란 설명이다. 간첩 사건이라면 으레 당국이 나서 간첩 조직 기구표에 권총.난수표 등 증거물을 벌여 놓고 성과를 선전하던 모습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희한한 광경이다. 피의자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간첩활동을 한 적이 없다"고 반론권을 행사하는 것도 낯설다.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의 노동당 가입 논란도 달라진 세상을 실감케 한다. 과거 같으면 반국가단체에 가입한 뒤 다른 지역담당자를 끌어들였다는 혐의가 재판과 수사 기록에 적시되고, 이를 통해 실형(4년)을 받았으면 간첩으로 낙인 찍히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제기된 의혹에 대해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딱 부러지는 근거 없이 간첩 운운했다가는 오히려 역공에 몰린다.

◆ 형법 개정 필요성 대두=이런 가운데 관계 당국에선 형법 제98조의 '간첩'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법은 '적국(敵國)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적국은 '소련.중공, 그리고 그 산하집단인 북한도 적국에 준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 법체계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중국과 수교한 뒤 적국의 개념은 북한으로 좁혀졌고, 남북 교류 협력이 활발해진 최근에는 이 부분마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위 당국자는 "법조문대로라면 우방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경우는 형법상 간첩죄를 적용할 수 없다"며 "지금과 같은 정보전쟁 시대에는 맞지 않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법 조항 중 '적국을 위하여'란 부분을 '외국을 위하여' 등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형법에서 '적국' 표현은 외환죄 조항에도 등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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