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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먹이며 480m 끌려가는 소녀를 아무도 안 지켜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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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7일 오전 9시, 서울 영등포구 한 초등학교 앞. 활짝 열린 교문으로 한 40대 남자가 들어섰다. 김수철(45)이었다. 목 부분이 늘어난 빨간색 티셔츠에 검은색 칠부바지를 입은 김에게선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하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비실도 없었고, 학생들을 돌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날은 이 학교가 재량 휴업을 하는 날이었다. 방과후 이뤄지는 컴퓨터 수업 등 일부만 이날 오전 이뤄졌다. 이 때문에 평소보다 교사와 학생이 적었다.

김은 한동안 운동장을 서성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지난 오전 10시. 김은 컴퓨터 수업을 받으러 교실로 향하던 2학년 A양(8)을 발견했다. “꼬마야, 이리 와 봐라.” 김은 A양을 불렀다. A양은 별 의심 없이 다가갔다. 평소 엄마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학교 안에서 만난 어른이라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A양이 다가오자 김은 미리 준비한 문구용 커터칼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칼을 A양에게 들이밀며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린다. 조용히 하고 따라와”라고 위협했다. “살려만 주세요, 조용히 하고 따라갈게요.” 아저씨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A양은 살고 싶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김을 따라갔다.

김은 A양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을 줬다. 그 손에 들린 커터칼은 A양의 턱을 향하고 있었다. A양의 옷깃 사이에 칼날을 숨겼기 때문에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A양이 김에게 끌려가는 동안 여러 사람과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40대 남자에게 어깨를 붙들린 채 울먹이는 여덟 살 여자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 앞 폐쇄회로TV(CCTV)를 확인한 경찰관은 “화면상으로는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고 전했다. A양은 그 상태로 학교에서 480여m 떨어진 김의 집까지 끌려갔다. 김은 집에 도착하기 50여m 전부터 손으로 A양의 눈을 가렸다. 그는 재개발주택가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 끝 집이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도 없었다. A양은 그곳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참하게 성폭행을 당했다. 초등학교 바로 맞은편에는 경찰치안센터가 있었고, A양이 달아난 범인의 집에서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찰지구대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제2의 조두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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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하다는 학교에서 당해=30분쯤 뒤 김은 잠이 들었다. 그는 경찰에서 “기분이 좋아 스르르 잠들었다”고 말했다. A양은 그 틈에 김의 집에서 빠져나와 학교로 도망쳤다. 울면서 학교로 돌아온 A양을 보고 깜짝 놀란 교사는 우선 A양을 근처 병원에 데려간 뒤 경찰에 신고했다. 영등포서 여성청소년계 여경이 나왔다. 여경은 A양과 함께 학교에서부터 김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A양은 눈이 가려진 지점에서 방향을 잃었다. 50m 떨어진 곳에 범인이 잠들어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경찰은 학교 주변에 설치된 CCTV에 찍힌 영상과 A양의 진술을 토대로 김의 인상착의를 파악했다. A양의 눈이 가려진 지점에서부터 탐문수사를 했다. 사건 발생 7시간 만인 오후 5시, “CCTV에 찍힌 영상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를 골목에서 봤다”는 주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오후 7시50분, 경찰은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집 문 뒤에 숨어 있던 김을 찾았다. 김은 검거되는 순간까지 커터칼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후 A양은 병원에서 6시간에 걸쳐 인공 항문을 만드는 수술을 받은 뒤 입원 중이다. 최소 6개월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김은 경찰에서 “술을 먹고 저지른 일”이라며 범행을 자백했다. 김은 특별한 직업 없이 일용직 노동일을 전전해 왔다. 이날 새벽에도 일거리를 찾으러 영등포역에 나갔지만 허탕을 쳤다. 그는 홧김에 혼자 감자탕집에 들어가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그 뒤 학교를 찾아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김은 22세 때인 1987년 강도강간 혐의로 구속돼 15년형을 살았다. 가정집에 칩입해 남편을 묶은 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성폭행했다. 그 외에도 절도·폭력 등 모두 12차례의 전과가 있다. 경찰은 9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김을 구속했다. 이 학교 교장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고만 답했다.

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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