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英 언론의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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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뮤지컬 '명성황후'의 영국 런던 공연이 지난 16일 막을 내렸다. 프리뷰를 포함해 총 19회 공연했다. 짧지 않은 레이스였다.

이번 현지 언론의 평은 1997년 뉴욕 공연의 대체적인 호평과 달리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계량적인 측면에서도 별점(5개 만점) 한 두개에 머물렀으며, 이 작품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은 섣부른 반론이 무색할 정도로 정교했다. 다만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문화(특히 잘 모르는 한국문화)를 여전히 '타자(他者)'로 보려는 서구의 오랜 편견이 엿보였다.

그런 상징적인 예로 나는 '국제화한 키치(Internationalised Kitsch)'라는 거북한 표현을 꼽고 싶다. 영국의 좌파 권위지이며 젊은이들에게 문화 리뷰의 준거(準據)가 되는 가디언이 리뷰에서 쓴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국제화한 유치한 모방품'이 될 것이다.

'키치'는 원래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 담론에서 등장한 용어다. 독일어가 어원(語源)이며 '속악한 것''속임주의''저속''치졸''모조품''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난 것' 등 의미는 여러가지다.

공통적으로 나쁜 뜻이지만 학자들은 서구 산업화 사회의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값싸고 감상적이며 귀여운 복제품을 지칭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천하고 과잉된 장식으로 치장된 '키치패션'은 물질문명을 조롱하는 뜻이 있다는 식의 논의 등이다.

아무튼 가디언이 '명성황후'에 대해 쓴 키치라는 표현 속에는 어떤 긍정의 기미도 발견되지 않는다. 음악·연출술·장면구성 등 모두 독창성이 떨어지는 서양 뮤지컬의 흉내내기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작품으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들어 '코리언 레 미제라블'이라 명명했다.

사실 '명성황후'는 창작극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여느 서양 번역 뮤지컬과 차이가 나는 독창적인 제작물로 보기는 어렵다. 서양 형식을 수용하면서, 그들이 1백년 이상 구조화한 뮤지컬의 '공식(公式)'에 대한 연구는 빈약했으며, 이 허약한 토대 위에 '명성황후'란 고대광실이 세워졌다. 당연히 서양을 극복하는 우리 식의 형식·문법의 개발은 취약했다. 논리성이 부족한 장면들의 짜깁기와 혼성모방의 흔적은 부인할 수 없다. 탄탄한 극작술,작품 성격에 맞게 구조화된 음악 형식 등에 단련된 영국 비평가의 눈에 이 비공식의 예술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연출가 윤호진씨도 이 작품의 '비공식성'을 인정한다. 그는 오히려 이런 유연성이 서양 뮤지컬보다 훨씬 큰 장점이며,이게 '영국을 놀라게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예술은 분명 수학과 다른 감성의 열정이 빚어내는 정화(精華)이지만, 윤씨는 비공식의 유연성이 구현되는 단계는 모든 공식을 섭렵한 뒤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피카소가 입체파의 거장이 되기까지 19세기 후기 인상파 이후의 전 사조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키치라는 소리가 듣기 싫지만, 빌미를 제공한 게 우리 쪽이라는 사실은 가슴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비록 편견이 있더라도 더 나은 다음 작품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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