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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사잇길로 '봄을 부르는 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남녘에는 벌써 훈훈한 바람이 분다. 우수(雨水·19일)가 지났어도 아직 쌀쌀하지만 조만간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우주 만물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할 것이다.

제주에서 시작한 화신(花信)이 다도해를 징검다리 삼아 남녘땅에 발을 디뎠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에서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이로운 모습을 눈여겨 보게 된다.

전남 완도읍에서 뱃길로 45분 거리인 청산도(靑山島). 섬 곳곳에 산이 자리잡고 사시사철 해송(海松)이 우거져 '푸른 산'이라고 한다. 들판에는 동토(凍土)의 어둠을 뚫고 나온 보리가 푸른 빛을 더한다.

지난해 10~11월에 파종한 보리는 3월 말~4월 초면 이삭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지금은 파릇파릇한 보리밭도 수확기인 5월로 접어들면 황금빛 들판을 이룬다.

평지가 적은 이곳에선 보리밭이 계단처럼 이어지며 산비탈 위에 푸른 양탄자를 깐다.밭이 끝나는 곳에는 이내 파란 바다가 펼쳐진다. 보리밭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이 섬내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은 당리 마을.

완도발 여객선이 도착하는 도청(道靑)항에서 자동차로 3~4분 거리인 이곳은 토속적인 섬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인 유봉(김명곤 扮)과 그의 자식인 송화(오정해 扮)·동호(김규철 扮)가 신명나게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던 낯익은 돌담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속에 나온 돌담길은 1996년 시멘트로 포장됐다. 이 때문에 섬을 다시 찾은 임권택 감독이 가슴을 치며 서운해 했다고 한다. 황톳길을 구경하러 온 여행자들 역시 아쉬움을 삼키고 돌아가야 했다.

많은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이 구간(2백m)은 2000년 초 시멘트 포장을 걷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지 주민들의 불만도 없지 않다. 섬 전체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묶여 있어 각종 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을 감수해왔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주민 수가 1만명을 넘었고 이곳에서 여수·부산·목포까지 여객선이 운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느 섬처럼 젊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이제 인구가 2천8백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거의 슬레이트 지붕인 당리 마을에는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소리를 연습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당시 영화 주인공들의 복장을 한 인형을 설치해 촬영 당시의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농지가 대부분 산비탈에 있어 지금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집이 많다. 때문에 외양간에만 있던 어린 소를 끌고 나와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쟁기질을 연습시키는 것도 이맘때 하는 농사일 중 하나다.

부부 내외가 보리·마늘·고구마·콩을 재배하는 최원표(72)씨도 햇살이 따뜻한 날을 골라 네살배기 소를 '일낄이러(연습시키러)'나왔다.

소에 씌운 멍에 끝에 쟁기 대신 타이어를 묶고 길이나 빈 밭에서 소를 걷게 하는 것이다. 생전 처음 멍에를 쓴 소는 겁을 먹은 듯 한참을 뛰어다닌다. 줄을 잡은 최씨도 함께 달린다.

"아따, 어떻게나 뜅기이 겁나지요, 겁나. 제깐에는 찌깐한 외양간에 있다 넓은 데로 나오니까…. 몇번 해야 용해지죠.(순해지죠)".

청산도에는 돌이 많다. 집집을 둘러싼 담장, 논둑·밭둑이 모두 돌로 돼 있다. 산지를 개간하면서 나온 돌들을 활용한 것이다. 산비탈에 넓적한 돌을 깔고 그 위에 15~20㎝ 흙을 덮어 만든 '구들장 논'도 산과 돌이 많은 이곳의 지형적 특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발 3백m가 넘는 산이 세 개나 되고 해발 1백50~3백m대의 산은 열 개나 되는 청산도에는 화재 때문에 민둥민둥해진 산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96년 3월 봄 한 농부가 놓은 들불이 산으로 번져 2박3일 동안 섬에 시커먼 연기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청산도=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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