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동맹 강화해 北변화 이끌자 : 이홍구 本社 고문의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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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우방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방한을 환영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한·미 동맹관계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온 국민은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어쩐지 편치 못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우정이 엷어져서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를 지킨 한국전쟁에서 4만명의 희생자를 낸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다만 세계사적 전환기가 몰고 온 위기상황 속에서 한·미 양국이 처한 각자의 입장에 대한 상호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관계에 있어 오늘의 시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지혜와 믿음을 모아야 할 때다.

광활한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한반도 남쪽에서 우리가 자유 국가를 유지해 온 것은 가위 지정학적 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기적을 이룩한 한국인의 의지를 우리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미국의 막대한 동지적 지원에 항시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자존심과 성취감에 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로 따라다니고 있는 것은 우리 한반도가 냉전시대의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이며 대결지대라는 사실이다. 이 답답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판단이 범국민적 차원에서 정립되지 못하면 국가 발전 전략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으며 한·미 동맹관계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전통적 애국심이나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할 과제가 결코 아니다.

자유·평화·통일이라는 우리의 세 가지 국가목표가 지닌 상호관계와 우선 순위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국민적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첫째, 우리는 자유를 지키는 것이 통일을 이루는 것에 우선한다고 선택한 국민이다. 그 통일이 설사 '자주통일'이라 해도 자유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자유가 없는 자주란 원초적 허구임이 널리 감지되고 있다.

둘째, 평화도 통일에 우선한다. 이 시대의 전쟁이 얼마나 가공할 파괴력을 동원하는가를, 따라서 민족 생존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평화를 희생하며 통일을 택할 사람은 없다.

셋째, 우리의 자유가 침해되는 공격과 위협에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대응해 반드시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국민적 결의가 확고하다. 자유는 대가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국민은 6·25 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친 쓰라린 대결의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유·평화·통일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은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에 있어 우리의 입장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러한 우리 정책의 기본 전제가 한·미 공동전략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미국 특유의 사명감을 지니고 활동하고 있다. 9·11 테러 사태는 오늘의 미국이 지닌 취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극적으로 노출시켰다. 미국의 힘과 부의 상징인 펜타곤·세계무역센터가 외부에서 획책된 성공적 테러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미국도 결코 예외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실증했다. 반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압도적인가를 확연히 보여 주었다. 이러한 취약점과 강점을 함께 고려한 부시 행정부의 세계전략은 적과 우방을 선별적으로 취사 선택하려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동맹국과 적성국가를 선별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준해 협력관계와 적대관계의 농도를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나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이러한 미국의 새 정책에 가장 신속하게 적응해 동맹관계를 강화시킨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피하려는 노력으로 돋보이는 예는 텍사스로 부시 대통령을 찾아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경우다. 또한 연이은 돌발적 사태로 인한 미·중간의 긴장 국면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 중국의 경우도 주목할 만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세를 몰아 미국은 국제관계의 기존 규칙이나 관례에 상당한 수정을 가하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심각한 인권 유린 사태나 대량살상무기를 무책임하게 개발하는 경우에는 주권국가에 대한 불가침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국제사회는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이 국제사회나 국제기구에서 어떤 수준·형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이러한 새로운 정책에 입각해 이라크·이란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선언은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우려와 조심스러운 반응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군사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첨예한 대결을 계속하며 어렵사리 평화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에 대한 우리의 공동 입장과 전략을 조율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북한체제의 도덕적 성격, 북한의 핵무기·생화학무기·미사일 개발이 수반하는 위험과 위협에 대한 평가에선 한·미 간에 큰 시각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및 이란과 북한을 한데 묶어 '악의 축'으로 단정한 것은 과도한 단순화란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라크와 이란의 체제 성격이나 군사적 위협은 중동이란 지역성과 이슬람이란 종교· 문화적 전통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중동 국가들 사이의 관계도 오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전통과 무관한 동북아 지역에 위치해 있는 북한의 위협을 이란이나 이라크와 동렬에 놓고 하나의 축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위협의 외형적 성격이나 징조에만 국한하면 유사성이 상당히 있더라도 이라크·이란과 달리 북한은 지역적 환경이나 체제의 성격에서 뚜렷한 질적 차이를 지니고 있다. 악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북한체제가 야기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특성을 면밀히 감안해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의 북한체제는 몇 줄기의 역사적 배경과 우연의 혼합이 만들어낸 결과다. 제국주의 시대의 반식민지 독립운동, 이데올로기시대의 마르크시즘의 영향, 국토 분단과 러시아군 진주에 따른 스탈리니즘의 득세, 냉전시대의 모험과 반미 자세의 체질화, 동양적 권력 세습과 교과서적 전체주의체제 건설 등 여러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다. 그러한 북한체제가 탈 냉전시기에 접어들면서 세계적 변화 과정에서 멀리 뒤떨어져 '악성 고립병(malign isolation)'에 시달리게 됐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군사력 강화, 특히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의존하려는 북한의 선택은 한반도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심각한 위협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을 예방해 민족 생존을 보장하려는 우리로서는 북한의 무모한 모험을 중단시키고 남북의 평화 공존을 위한 새 틀을 짜는 작업에 나서는 것이 마땅한 길이었다. 7·4 공동성명에서부터 6·15 정상회담에 이르는 한 세대에 걸친 우리의 통일 노력은 바로 그러한 평화 유지에 대한 긴박감을 바탕으로 전개됐던 것이다. 뒤늦게라도 북한이 국제사회의 변화 추세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선택한다면 이를 적극 지원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정치적 통일은 무기 연기하고 경제·사회·문화의 차원에서 민족공동체 건설의 벽돌을 한 장씩 쌓아 올리자는 것이 우리 국민의 뜻이 아닌가. 이 뜻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평화적 노력은 인내력을 바탕으로 계속 될 것이다.

우리의 이웃인 중국과 일본이 이러한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지역적 협조 분위기도 점차 성숙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중동을 뒤덮은 전쟁의 먹구름이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고 싶어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방한이 한·중·일 3개국 방문의 일환임을 주목해야 한다. 동북아 3국은 우리의 이웃을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번영하는 이웃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나눠 갖고 있다. 또 그 꿈을 이루는 데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중·일 3국과 미국의 비전 및 이익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북한의 평화적 변화를 함께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부시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우방 원수의 의례적 친선 방문보다 훨씬 큰 의의와 기대를 수반하는 것이다.

자유·평화·통일이라는 우리의 세 가지 국가목표가 지닌 상호관계와 우선 순위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국민적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첫째, 우리는 자유를 지키는 것이 통일을 이루는 것에 우선한다고 선택한 국민이다. 그 통일이 설사 '자주통일'이라 해도 자유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둘째, 평화도 통일에 우선한다

셋째, 우리의 자유가 침해되는 공격과 위협에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대응해 반드시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국민적 결의가 확고하다.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은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에 있어 우리의 입장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러한 우리 정책의 기본 전제가 한·미 공동전략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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