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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을 살리는 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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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온 햇볕정책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중대한 기로에 섰다. 내일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측은 햇볕정책 지지를 거듭 다짐하고 있지만 그런 공식적인 태도와 달리 햇볕정책의 효율성을 의심한다는 입장도 숨기지 않는다. 햇볕정책이 지금껏 북한을 변화시킨 게 뭐냐는 것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부시의 연설은 햇볕정책을 관(棺)속에 넣고 마지막 못질을 해버린 셈"이라며 이제 한국내 대중적 지지도 잃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면서도 강경기조엔 변함이 없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확산 중단과 휴전선 집중 무력의 후방철수라는 강경요구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 한·미 동맹강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DJ의 말에서 나타나듯 우리 정부도 미국의 이런 입장에 발 맞추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은 어떻게 되는가. 교류·협력하고, 먼저 주고 나중에 얻는(先供後得) 따뜻한 북한 감싸기로 특징되는 햇볕정책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는 게 아닌가. 미국의 강경요구에 우리가 공조(共助)하는 이상 따뜻한 햇볕 대신 냉풍이 몰아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은 앞으로 이름만 남게 되는 것인가.

내일의 한·미 정상회담은 햇볕정책과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어떻게 절충하고, 양립(兩立)시키는 논리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핵심이다. 미국은 또 한번 햇볕정책 지지를 공식 표명하겠지만 우리 정부는 그 말에 안도할 게 아니라 이번 일을 계기로 햇볕정책 전반을 재검토·재정립하는 작업에 곧 바로 착수해야 할 것이다.

사실 햇볕정책은 필요하고도 좋은 정책이었다. DJ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햇볕정책 외에 대안이 없음을 인정해왔다. 그런 햇볕정책이 오늘날 이런 위기에 빠진 까닭이 뭔지 냉정히 검토·반성하는 정부차원의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생각해 볼 일은 그동안의 햇볕정책은 그 내용이 너무 단선(單線)·단색(單色)·단미(單味)가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어떤 정책이라도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내용과 추진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햇볕정책은 오직 북한을 감싸고 돕는다는 하나의 선(線) 하나의 내용으로 일관돼 온 감이 있다.북한이 약속을 어겨도 눈감고, 국내여론이 들끓어도 퍼주고, 사리에 어긋나도 참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대화를 애걸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정책이 당연히 가져야 할 현실 적합성·효용성은 무시돼 버렸다.

하늘의 햇볕도 여름 다르고 가을·겨울이 다르다. 정책햇볕도 북한이 하기에 따라, 또는 국내상황이나 국제환경에 따라 햇볕의 강도(强度), 쪼이는 대상과 방향·속도·시간 등을 적절히 조절했어야 했을 텐데 그런 탄력성과 지혜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맹목적 햇볕'이 아니라 '눈(眼)을 가진 햇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생각할 일은 DJ의 집념이 워낙 강하다 보니 햇볕정책이 일종의 신줏단지처럼 돼버린 측면이다. 어떤 정책이든 국익에 부합·기여하자면 다른 정책과 균형·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정책 자체가 교조화(敎條化)되면 다른 대안을 봉쇄하거나 국가과제의 우선순위를 무시하는 결과를 빚기 쉽다.

가령 정부 내에서 햇볕정책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터부처럼 되고 햇볕정책에 불리한 정보가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다는 보도가 무엇을 뜻하는가. 부시 행정부가 거론하는 대량살상무기 문제나 휴전선 집중 무력 문제는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더 먼저 걱정하고 더 강력히 요구할 일이었다. 그러나 햇볕정책이 다칠세라 그런 문제는 못본 체 또는 소극적으로 대해 온 게 아닌가. 이번에 '악의 축'발언이 나온 후 민주당이 국회 대표연설에서 강도 높게 "햇볕정책을 흔들면 안된다"고 나온 것이나 일부 집권세력의 과민대응도 햇볕정책의 경직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정책이 도그마화(化)하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정책이 아니라 나라가 정책에 봉사하는 꼴이 되기 쉽다.

총론적으로 말해 햇볕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고 계속 더 발전돼야 한다. 그러나 각론과 그 운용은 좀 더 내용이 풍부해지고 탄력성을 가져야 하며 다양한 추진방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 여름햇볕이었다가 겨울햇볕이 될 수도 있어야 하고 상대방이 먹구름을 일으키면 잠깐 쪼이기를 쉴 수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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