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집착하는 DJ 의식 '惡의 축' 진의 잘 전달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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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지난달 30일·이하 한국시간) 발언 이후 열흘이 흘렀다. 이 기간 중 부각된 한·미 관계의 난기류는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현저한 대북 시각차가 주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 이를 여과없이 金대통령에게 전달하지 못한 시스템상의 문제도 적지 않았다. 또 청와대와 외교통상부·민주당 등 의사결정 단위들 간의 정보·의사소통 채널이 긴밀하게 작동하지 않은 탓도 있다.
부시 발언을 가장 실감 나게 느낀 인사는 지난 4일 귀국 길에 경질된 한승수(韓昇洙)전 외교부 장관이다. 그는 '악의 축' 발언 다음날인 31일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이틀 뒤인 2월 2일에는 파월 국무장관을 만났다.
그러나 韓전장관은 부시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한 내용과 정보를 金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회담의 주요 내용은 외교 전문으로 정부에 전달됐으며, 韓전장관을 배석했던 임성준(任晟準)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귀국 후 金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미 회담의 우리측 공식 대표가 느낀 미국 의사결정 핵심 인사들의 입장을 金대통령이 생생하게 전달받지 못한 것은 상황 판단을 그르칠 위험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더구나 韓전장관은 방미 기간 중 자신의 경질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회담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우리측 대표들이 햇볕정책에 대한 金대통령의 강한 애착을 의식한 나머지 실제 회담에서 미국측의 진의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측 회담 참석자는 韓전장관을 비롯해 임성준 외교안보수석·김성환 외교부 북미국장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파월 국무장관이나 라이스 보좌관이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 화해 협력에 대한 지지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4일 라이스 보좌관이 가토 료조 주미 일본 대사와 만나 언급한 내용을 정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북한과 대화를 원했다. 한국의 햇볕정책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측 인사들은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있으나 성과가 없다"는 말을 했는데, 우리측 대표들은 "미국이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는 점만 부각한 셈이다. 전직 고위 외교관에 따르면 "관료들은 본능적으로 대통령이 어떤 정보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고, 이에 맞는 정보를 생산해 보고하려 한다"고 꼬집었다.
지난 5일 민주당 김근태 고문의 국회 대표 연설과 6일 김성호 의원 등의 미 대사관 항의 방문에 대해서도 미국측은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金대통령이 지난 6일 공관장 만찬 회동에서 "반미는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경고한 것도 이같은 미국측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김근태 고문의 대표 연설이 있었을 땐 원고를 당일 아침에야 받아 보았고 아무런 코멘트도 달지 않았다고 한다.
전영기·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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