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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살 점점 깊어지는 ‘Mr. 유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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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5일 부산에서 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를 끝내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산 블룸버그=연합뉴스]

‘마라도나 효과’. 시늉만 했는데 상대가 제풀에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수비수 5명을 따돌리고 골을 넣은 데서 유래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볼을 잡은 마라도나, 골문을 향해 60m를 직진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수비수들은 마라도나가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방향을 트는 바람에 오히려 공간을 내주고 말았다.

영국 중앙은행 총재 머빈 킹은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도 마라도나 효과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굳이 이렇다 할 통화정책을 쓰지 않고도 시장을 관리한다는 것은 시장이 중앙은행을 무서워할 정도로 신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유럽중앙은행(ECB)은 마라도나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공동의 정부가 없는 유로존에서 ECB는 마지막 버팀목 같은 존재다. 버팀목이 흔들리자 유로화는 힘없이 주저앉고 있다.

불신은 ECB가 지난달 재정적자국의 채권 매입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미스터 유로’ 장클로드 트리셰(68) ECB 총재가 구원투수로 나섰는데, 이게 논란이 됐다. 존 테일러 미 스탠퍼드대(경제학) 교수는 “ECB가 정부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며 “독립성과 신뢰에 금이 갔다”고 지적했다.

물론 다른 평가도 있었다. 골드먼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짐 오닐은 “1985년 플라자 합의 후 가장 인상적인 국제 공조”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요즘 유럽 상황은 마라도나가 열 명이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트리셰와 ECB의 신뢰 위기는 유로존 내 갈등과 맞닿아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이고,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쪽과 더뎌도 원칙대로 가자는 쪽의 대립이다.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인 트리셰는 1980년대 말 파리클럽 의장을 했다.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의 주요 역할은 부도 위기에 빠진 나라의 채무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그에겐 위기에 대한 적극적 개입의 경험이 있는 셈이다. 그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도 지냈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 타임스(FT)는 “그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이고 폭넓게 이해한다”고 평했다.

그런데 원래 ECB가 추구하는 모델은 독일의 분데스방크다. 세계에서 가장 독립적인 중앙은행으로 통했고, 물가안정 외에는 곁눈질을 안 하는 걸로 유명했다. 유로존이 경제정책의 공조를 느슨하게 한 채 출발한 데도 정치적 입김을 최소화하려 한 분데스방크의 고집이 작용했다. 그 고집불통을 시장은 신뢰했다. ECB는 원칙대로 한다는 믿음이었다.

차기 ECB 총재로 유력시되는 악셀 베버 ECB 집행이사(분데스방크 총재)도 국채 매입에 비판적이다.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국채 매입은 표준적이지 않은 임시 조치지만 예전에도 쓴 적이 있다”고 말한 트리셰와 거리가 꽤 있는 셈이다. 이런 부조화가 새삼 문제가 되는 건 요즘 시장 상황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조율 없이 총재가 시장에 메시지를 보내야 할 일은 자꾸 늘고 있다.

시각차를 넘어 시장이 못 미더워하는 건 효과다.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ECB는 연말까지 3000억~6000억 유로어치의 채권을 사야 할 판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상당수가 정크(투자 부적격) 등급이란 게 문제다. 영국이나 미국의 중앙은행이 AAA급인 자국 채권을 사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실타래도 꼬였다. 재정긴축이 시작된 유럽에서 통화긴축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런데 유로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인플레 압력은 커졌다.

프랑스에서 트리셰의 별명은 ‘저스틱스(Justix)’다. 로마 제국에 대항한 만화 속 영웅 아스테릭스와 그의 이름의 합성어다. 그가 유럽과 ECB에 대한 신뢰 위기를 아스테릭스처럼 헤쳐나갈 수 있을까. ECB는 10일 통화정책회의를 연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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