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Champions - 세계를 지배하는 작은 기업 ⑦ 스틸플라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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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이쯤 되면 거의 쇳덩이다. 용처가 따로 있기에 이렇게 단단하게 만드는 거다. 심해 유전을 뚫는 파이프, 극지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대형 운동장의 기둥 등에 반드시 필요하다.

단순히 철판을 둘둘 말아 만드는 관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철판이 두꺼워질수록 둥글게 말기도 어렵거니와 원통 안쪽과 바깥쪽의 둘레가 달라 갈라지기 십상이다. 철강 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이지만 1990년대까지는 전량 수입해 썼다. 지금도 일반 강관을 만드는 곳은 100곳이 넘지만 후육강관 생산업체는 10여 개에 불과하다.

이런 고난도 사업에 비교적 늦게 뛰어든 스틸플라워는 국내보다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회사를 세운 지 8년 만에 이미 세계시장 점유율 3위를 달성했으니 꿈은 슬슬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시작-순진한 낙관=꽃과 철.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 이름은 김병권(47) 사장의 첫 직장인 포스코에서 유래했다.

“1988년 입사해 스테인리스 사업부에 배치됐는데 그곳 현관에 ‘스테인리스는 철강의 꽃이다’라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철강의 꽃을 피우겠다고 다짐했죠.”

꿈이 이뤄지는 데는 약간의 우연도 필요하다. 외환위기 당시 그는 독립해 조그만 대리점을 차렸다. 포스코에서 마케팅 엔지니어로 있을 때 대우전자를 상대로 하던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대우그룹이 어려워지자 포스코도 납품을 중단했지만, 그는 ‘대우그룹은 망해도 대우전자는 살아남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모험은 보기좋게 성공했다. 여직원 한 명과 세 평짜리 사무실에서 시작한 대리점이 2년 만에 연매출 100억원을 달성한 것이다.

김병권 스틸플라워 사장(가운데)과 직원들이 후육강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후육강관은 다른 강판보다 두꺼워 만들기가 훨씬 어렵지만 설립 10년이 안 돼 세계 시장이 주목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후육강관 사업이었다. 당시 후육강관 업계 1위였던 S사에 우연히 들른 게 계기였다. 현대중공업 같은 조선사와 플랜트 사업을 하는 건설사들이 물건을 받아가려고 줄을 서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는 “블루오션이 따로 없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2002년 부산 진영공단에 프레스 설비를 들이고 공장 문을 열었다. 정문 앞 간판에는 오랫동안 가슴에 묻었던 이름이 내걸렸다. ‘스틸플라워’의 싹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장을 짓기만 하면 당장 주문을 줄 것처럼 말하던 수요처들이 막상 공장을 돌리기 시작하자 싸늘하게 돌아선 것이다. “경험 없는 회사에 물건을 맡길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 업계에선 레퍼런스(납품이력)가 필요하고, 그게 진입장벽이라는 사실을 공장을 세우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후육강관을 쓰는 국내 대형 조선·건설사는 물론이고 해외 수요처의 대리점에도 시제품을 깔았지만 창업 후 1년이 다 되도록 단 한 건의 주문도 받지 못했다. 200억원 넘게 투자한 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반전-세계 시장으로=더 이상 시제품을 만들 돈마저 떨어질 무렵, 꿈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카타르에서 주경기장인 칼리파 스타디움을 짓는 데 시제품을 보내보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김 사장은 “시제품이어서 물량은 50t에 불과했지만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 있던 터라 지극정성을 다해 만들어 보냈다”고 말했다.

정성이 통했을까. 품질에 만족한 카타르 측에서 1500t을 추가 주문했고, 이어 올림픽 스타디움 기둥과 지붕에 쓸 강관 1700t의 주문도 왔다. 이게 실적으로 잡히면서 영업은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기사회생이었다.

당시만 해도 후육강관 업체의 역할은 임가공에 불과했다. 일단 대형 조선사나 플랜트 시공사의 납품업체로 등록만 되면 물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원자재인 철판도 알아서 공급해 줬다. 사실 김 사장도 그걸 믿고 편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 발을 못 붙인 스틸플라워는 세계시장을 직접 공략해야 했다. 그게 스틸플라워의 경쟁력을 키워줬다. 후육강관을 쓰는 석유 메이저나 엔지니어링 회사를 직접 접촉하면서 현장의 요구사항을 알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디고, 수천m 심해에서 시추공을 뚫기 위해선 특수 재질의 파이프가 필요하다. 스틸플라워는 앉아서 주문을 기다리지 않고 극한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특수강관을 먼저 개발해 수요처에 제시했다. 김 사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업체인 포스코가 곁에 있어 공동연구를 한 결과”라고 공을 돌렸다.

결국 엑손모빌·BP·셰브론 등 모든 석유 메이저들을 고객으로 확보했고, 시장점유율은 단숨에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지난해에는 코스닥 상장도 성공리에 마쳤다.

◆도약-팽창하는 시장=2005년 510억원에 불과하던 스틸플라워의 매출은 지난해 1689억원으로 뛰었다. 이 중 92%가 수출에서 나왔다. 앞으로도 한동안 이런 성장세가 계속될 것으로 김 사장은 자신한다.

“유가가 오르면서 전에는 경제성이 없던 유전까지 개발하는 추세입니다. 심해나 극지의 유전이 개발될수록 더 고급 품종의 후육강관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그에 맞춰 기술개발도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겉은 탄소강이고 안쪽은 비탄소강인 특수관을 만들 수 있는 용접 기술에도 도전하고 있다. 이런 관은 t당 2만 달러가 넘지만 현재 세계시장 1위인 독일의 EEW만 생산기술을 갖고 있다.

국책과제로 진행 중인 3차원 곡면 성형기술도 회사의 비밀병기다. 대형 선박 앞부분의 굴곡면이나 운동장 지붕에 얹는 유선형 구조물은 현재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를 기계화하는 기술을 확보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글=최현철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중동·동남아에 공장 설립 나서 … 제2 도약 채비

미래 먹을거리는

스틸플라워는 다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 필 꽃은 어떤 모양일지 아직 미지수다.

당장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생산시설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 순천에 짓고 있는 새 공장이 완공되면 생산능력은 두 배로 늘어난다.

해외 사업거점을 마련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스틸플라워의 매출은 거의 대부분 에너지 기업과 연관돼 있다. 그러니 에너지가 나오는 곳에 공장을 세워 현지에서 빠르게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최대 원유 생산지인 중동과, 최근 개발 사업이 한창인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가 1순위다.

에너지가 석유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풍력, 태양광 등 최근 각광받고 있는 신재생 에너지도 개척 대상이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뼈대나 공장, 풍력발전기의 기둥도 굵고 튼튼한 강관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스틸플라원 김병권 대표는 “철강을 활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에너지 중공업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조금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시장이 레드 오션으로 변할 때에 대비한 것이다.

스틸플라워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강관으로 만든 구조물이다. 후육강관을 구입한 업체는 필요한 곳에서 이 관을 조립해 구조물을 만든다. 그게 곧 해양 플랜트나 송유관, 스타디움이다. 이 회사 박춘석 경영기획부장은 “요즘 들어 거래하는 외국 발주사들이 ‘핵심 부자재를 만드는 스틸플라워라면 직접 구조물을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엔지니어링 기술이다. 아무리 좋은 후육관이 있어도 조립과 연결 기술이 없으면 그냥 쇳덩이일 뿐이다. 스틸플라워는 기술을 지닌 기업을 사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해 해안기계산업이라는 크레인 회사를 인수했다.

조금씩 경험도 쌓고 있다. 지난해에는 160m짜리 강관 모듈을 만드는 시범 프로젝트를 했다. 이런 경험과 기술이 쌓이면 엔지니어링 노하우가 될 것으로 스틸플라워 측은 기대한다. 김 사장은 “우리만큼 강 구조물에 대해 잘 아는 데는 없다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전문가가 본 스틸플라워

석유가 부족해질수록 석유 메이저들은 새로운 유정을 개발하기 위해 더 험한 곳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럴수록 투자비도 더 많이 든다. 품질 좋고 비싼 파이프와 드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유를 사용처까지 들여오는 거리도 멀어지게 된다. 더욱 긴 파이프라인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석유 메이저들이 투자해야 하는 비싼 파이프와 드릴, 그리고 좀 더 길어지는 파이프라인이 스틸플라워에는 새로운 시장이다. 국제에너기기구(IEA)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에너지 인프라 투자와 관련한 예산은 2010년까지 연평균 300조원 이상이다.

최근 다시 뜨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에도 후육강관이 들어간다. 스틸플라워는 한국이 새로운 에너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업 모델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에 맞춰 스틸플라워는 최근 설비를 대대적으로 늘리고 있다. 총 투자비는 126억원으로 증설 작업이 끝나고 나면 스틸플라워의 생산능력은 현재의 연 12만t에서 두 배 가까이로 늘게 된다. 하지만 최근 실적은 다소 실망스럽다. 올 1분기 스틸플라워는 매출액 421억원에 16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스틸플라워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회사다. 따라서 시장 진입을 위한 약간의 출혈은 결국 열매를 맺어서 돌아올 것이다.

최근 대형 철강업체들도 후육강관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장이 매력적인 만큼 앞으로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지금의 단기적인 수익성 둔화는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보약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지윤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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