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에 푸대접… "왜 이 고생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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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과학자가 되면 스타로 뜨고 부자도 되는 시대'. 이공계 인력 이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함축한 말이다. 대접을 잘해주면 이공계로 오지 말라고 해도 줄을 설텐데, 이공계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대안은 없는지를 알아본다.
편집자| "과학기술자들의 상당수가 자식들한테 과학기술을 전공하라고 권하지 못합니다. 살얼음판을 걷듯 밤낮으로 공부·연구를 해야 하지만 평생 보장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20여년 동안 과학기술계에 몸담아 온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과 조동호(46)교수의 이 말은 이공계에 몸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40대 중반인 지금도 그는 오전 9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1~2시에야 퇴근한다.
趙교수의 지도를 받고 있는 대학원생들도 마찬가지다. 이공계는 학문이 어려워 학생으로서 공부하기도 힘들지만 사회에 진출해서도 학창시절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버틸 수 있다. 기술은 국경이 없어 세계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눈 팔면 그대로 낙오한다.
이공계를 택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이유의 하나다.
한양대 이영무 교수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원인으로 '수학과 과학이 공부하기 어렵다''부모들도 자식들이 공부하기 힘든 이공계에 진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단연 상위에 꼽혔다.
진학 당사자인 청소년이나 그 부모들 상당수가 이공계 지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사회에서 이공계 출신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서울대 공대 이장무 학장은 "국제통화기금(IMF)사태 때 산업체들이 연구개발 인력부터 마구 잘랐다"며 "이제 과학기술자를 잘 대접하는 것보다 '덜 소외'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장회사 대표이사 중 이공계 출신은 10명 중 2.5명 꼴이다. 또 올해 기술·사법·행정·외무·지방고시의 선발 인원(1천3백86명) 중 기술고시는 3.6%인 50명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기술직으로 고위 공무원이 될 확률은 수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그만큼 낮다.
공직과 민간기업에서 이공계 출신이 거의 출세를 못하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다. 정부출연연구소의 최고위직 연구원인 책임연구원(연구원 16년차)의 경우 연봉이 4천5백만~5천만원이다. 삼성그룹의 비기술직 차장(입사 15년차)은 6천만~6천5백만원, 주요 시중은행 차장은 6천만~7천만원이다.
외국과 비교하면 이 차이는 더욱 커진다.미국의 한 재료관련 회사의 경우 박사학위를 딴 뒤 6년차의 연봉이 14만달러(약 1억8천만원:기본 연봉+보너스+의료보험 등 각종 사회보장 혜택)다.
박사학위가 없는 10년차 대졸자의 경우 기본 연봉이 9만~11만달러(1억1천만~1억4천만원)에 이른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어렵게 스카우트해 온 우수 연구원들이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미국·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연구자들을 사회적으로 대우하고 이민법상 혜택까지 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반 미국으로 돌아간 정부출연연구소의 한 30대 박사는 "미국에 가면 우리나라의 서너배 연봉에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된다"고 한국을 떠난 이유를 밝혔다.
벤처 바람도 이공계 석사·박사 과정에 진학하려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골치 아픈 연구를 하지 않아도 벤처만 잘하면 돈도 벌고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인재들이 벤처 쪽으로 몰린 것이다.
서울대 전기공학부 이신두 교수는 "올해 석사과정 90명 모집에 서울대 출신은 43명 밖에 응시하지 않았다"며 "나머지는 대부분 벤처로 갔다"고 말했다.그 중에는 석·박사학위과정 중간에 그만두고 벤처행을 택하는 사람도 꽤 있다.
한 투자신탁회사의 金모(35)과장은 서울대 이공계 박사과정을 마쳤으나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맞아 금융계로 들어선 경우다.
변리사나 고시 쪽으로 눈을 돌리는 이공계 출신들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부분 낮은 보수와 사회적 대우 때문이다.
포항공대의 경우 학사 졸업 뒤 석사 진학률이 99학년도 75.8%, 2000학년도 67.3%, 2001학년도 61.4%로 낮아지고 있다. 다른 대학의 이공계 학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천성순 위원장은 "하루 아침에 이를 바로잡기는 어렵지만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의 원천인 점을 감안해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장래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방주·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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