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폭은 그만" 삶의 감동에 앵글을 맞춰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0면

지난 연말 2000년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만난 곽경택 감독은 무척 들떠 있었다.
전국 관객 8백여만명을 기록한 '친구'에 대한 흥분 때문이 아니었다. 6월 말 선보일 신작 '챔피언'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주먹을 치고 받는 권투영화가 아닙니다. 세계 챔피언이란 목표를 향해 삶의 모든 걸 걸었던 한 복서의 삶을 그릴 작정이죠. 인간의 비애가 영화의 축입니다. 복싱은 영화를 끌고가는 실마리일 뿐이죠."
곽감독은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챔피언'은 1982년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가 링 위에서 숨져간 김득구 선수의 집념과 희망을 휴먼 터치의 드라마로 녹여낼 작정.
'친구'의 콤비였던 곽감독과 유오성이 다시 손을 잡고 벅찬 감동을 전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유오성은 김득구를 '재현'하기 위해 혹독한 체력 훈련을 받았다.
2001년 영화판에 휴머니즘이 일렁일 전망이다. 지난해 스크린을 달궜던 조폭 영화류의 코미디가 스쳐지나간 빈 자리에 '사람 냄새'가 가득찰 것으로 보이고 있는 것.
사람의 '흔적'이 없는 영화가 있을 수 없겠지만 올해는 특히 한 인물의 일생을 훑어가거나, 삶의 구석구석에 앵글을 들이대는 휴먼 드라마가 왕성하게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액션·폭력·엽기 등 최근 우리 영화계의 흥행 코드 사이에서 실종됐던 '인간'을 다시 불러오는 셈이다.
가장 관심이 몰리는 작품은 '취화선'(5월 개봉 예정)이다. 임권택 감독이란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 연출한다는 무게감은 물론 우리 영화로선 유례가 드물게 화가의 일생을 클로즈업 함으로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조선 후기의 천재적 화가였던 오원 장승업 얘기다.
그의 기행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어느 정도까지 되살릴지 관심거리다. 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여부도 미찬가지다.
임감독은 "칸영화제 얘기는 그만 했으면 한다. 불우한 성장 환경과 우울한 시대 상황을 예술로 극복하려는 장승업의 구도정신, 그것은 바로 요즘 영화인들이 되찾아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지난해 '파이란'에서 절정의 연기를 보여준 장승업역의 최민식은 중견 한국 화가들로부터 동양화의 'ABC'를 사사하며 또 다른 변신을 기약하고 있다.
극장가의 '인간적' 성향은 사실 연초부터 시작됐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모두 각기 다른 장르와 색깔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중심엔 '드라마 회복'이란 공통된 목표가 놓여 있다.
이는 지난해 시장 점유율 46.5%란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룬 우리 영화계가 흥행의 축제 속에서 놓쳐버린 부분, 즉 사랑·우정 등 가장 원초적인 감정선을 건드리고 영화 관람의 선택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런 흐름 속에서 주목받는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3월)과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6월)다. 정통 하드 보일드를 표방하는 '복수는 나의 것'은 누나의 수술비를 위해 아이를 유괴하는 농아(신하균)와 아이를 잃은 아버지(송강호)의 복수극을, '오아시스'는 희망없이 방황하던 한 남자(설경구)가 외롭게 살아가던 장애인 여자(문소리)를 만나면서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JSA'의 박찬욱, '박하사탕'의 이창독 감독이 삶의 고단함을 어떤 식으로 녹여낼지 주목된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4월)에 대한 관심도 크다.
칠순의 벙어리 외할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온 일곱살짜리 꼬마 손자에게 쏟아붓는 크나큰 사랑 얘기다.
할머니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기자가 일반인이라는 점도 우리 영화로선 보기 드문 실험이다.
지난해 '달마야 놀자'를 히트시킨 시네월드의 이준익 대표는 "일상과 괴리된 조폭류의 코미디에서 용인됐던 '휘발성 웃음'은 이제 소통되기 어렵다"며 "장르에 관계없이 삶의 진정성을 파고드는 작품들이 올 영화판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