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주력산업 타격 가시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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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3척, 일본 15척. 세계 1,2위를 다투는 한·일 조선업계의 지난 1월 한달 선박 수주 성적표다. 한국조선공업협회의 유병세 기획관리부장은 "엔저의 여력으로 일본이 선박 단가를 낮추는 등의 방법으로 최대 경쟁국인 우리나라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가격인하 공세에다 국제 해운경기 침체까지 겹쳐 선박 수주가격은 떨어지고 국내 조선사들의 채산성도 나빠지고 있다.
20만t급 이상의 대형 유조선 단가는 지난해 3분기 7천4백만달러에서 4분기 7천만달러로 떨어졌다.
한국의 주력 선종(船種)인 대형 컨테이너선과 액화천연가스(LNG)선도 사정은 비슷하다.
엔저의 골이 깊어져 마침내 심리적 마지노선인 '1백엔=1천원'을 밑돌게(엔값이 싸지게) 되자 조선·자동차·철강 등 한국의 수출 주력품목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박진달 기획조사팀장은 "그간의 엔저는 수출경쟁력과 수출기업 채산성을 우려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그 영향이 본격화할 정도에 이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는 업계와 정부의 엔저 대비책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4일 일제히 내놨다. 업계는 체질개선 노력을, 정부는 환율 안정 및 수출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엔저 먹구름 가시화=대한상의가 지난 주말 8개 주요 업종 단체의 기획조사 담당자들을 긴급 소집해 엔저 문제를 논의한 결과 분위기는 역시 심상찮았다.
대부분 업종이 바라는 적정환율은 1백엔당 1천~1천1백원대인데 이미 지난 1월 말 9백88원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는 1년 전보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3% 떨어진 데 비해 원화는 3.7% 떨어지는 데 그친 결과다.

<표 참조>
특히 조선·자동차·철강 등 일본과 경합하는 업종들은 엔화 환율이 적정 수준을 지나 손익분기점(9백~9백50원)을 위협하는 수준에 근접해 위기를 더욱 실감하는 표정이었다.
조선업종의 경우 지난해 4분기 선박수주 가격이 원화 기준으로 2.4~10% 떨어졌다. 일본 조선업계는 엔저를 틈타 우리보다 3.7배 가까운 수주물량을 따낸 것으로 조선업계는 추정했다.
일본보다 10~15%의 가격경쟁력이 있다는 자동차도 엔 환율이 10% 떨어질 경우 서너달 시차를 두고 2% 정도 수출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철강 역시 원가경쟁력은 일본보다 우위.하지만 납기 준수 정도나 수주 조건·마케팅력 등 여타 경쟁력에서 뒤지는 바람에 적어도 '1백엔=1천원'선은 유지해야 수출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석유화학과 전자·반도체·섬유 등의 업종은 일본과 겨루는 정도가 적거나 품목이 다양하다는 특성 때문에 엔저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차원의 대비책 필요=대한상의 박형서 경영조사팀장은 "정부의 지나친 외환시장 개입은 부작용이 있겠지만 최근 엔화 약세는 우리 수출 주력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했다"면서 적절한 시장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업계에 대해서도 ▶사업다각화▶비 가격경쟁력 향상▶환 리스크 관리 강화▶기존 거래처의 유지·관리 등 자구노력을 통해 엔저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촉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 국내 주력산업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전경련 보고서는 "지금까지 엔저 현상이 우리 기업들의 수출이나 현지 판매에 결정적 영향을 준 징후는 적지만 올 상반기 내내 엔저가 지속되면 후유증이 심각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 업체들이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단가 인하·마케팅 등 공세에 나서 자동차·조선·기계·철강·해외건설 등에 큰 주름살을 지울 수 있다는 것.
보고서는 "일반기계의 경우 국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저가의 일본제품 수입이 늘어나 무역역조의 원인이 되고, 해외건설도 선진 공사관리 시스템을 갖춘 일본업체와의 수주경쟁에서 밀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영욱 전문위원·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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