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제 축소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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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내 영화관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을 규정한 스크린 쿼터제의 축소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재정경제부가 한·미 투자협정(BIT)과 관련해 스크린 쿼터 일수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재경부의 입장은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지난해 40%를 넘어서는 등 자생력을 갖췄으므로 이제 쿼터 일수를 단계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지난달 28일 '스크린 쿼터 축소음모 저지 및 한·미투자협정 반대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쿼터제는 한국 영화의 과보호 장치인가, 아니면 문화의 종(種)다양성을 인정치 않으려는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심광현(沈光鉉·46)영상원장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최병일(崔炳鎰·44)교수가 본지 홍은희(洪垠姬)논설위원의 사회로 격론을 벌였다.| ▶TV·비디오는 물론 인터넷·DVD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영화를 접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스크린 쿼터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심광현 원장=멀티미디어 시대라는 건 단순히 접할 수 있는 윈도(창구)가 여러 개 있다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그만큼 콘텐츠가 퍼져나가는 효과가 커졌다는 이른바 '윈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 산업이 팽창하면서 영화 상영-비디오 출시-TV 방영의 수순을 밟으며 영화가 창출하는 수익이 확대됐다. 스크린 쿼터제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극장 상영이 윈도 효과를 창출하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최병일 교수=영화에 대한 접근도는 분명히 높아졌다. 인터넷을 통해 예고편은 물론 불법 유통이긴 하지만 소비자가 극장을 거치지 않고도 본편까지 볼 수 있는 시대다. 또 미리 본 사람들의 견해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파돼 작품의 성패도 빨리 결정된다. 그런데도 극장에서 의무상영을 강제하는 것이 적절한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야 할 때다.
▶쿼터제가 최근 한국 영화 산업 발전의 핵심인가.
심=그렇다. 90년대 이전에는 의무상영일 1백46일 중 실제로 한국 영화를 건 것은 50일 가량이었다. 93년 스크린 쿼터 감시단이 결성되면서 영화관들은 차츰 규정일수를 지켜갔다. 상영일수 규정이행률이 95%대로 올라선 시기와 한국영화 발전기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쿼터제의 기여를 입증한다.
최=한국영화가 발전한 이유가 쿼터제만이라는 것은 무리다.'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렇듯 민주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소재의 도약이 이뤄졌다. 어둠침침하던 극장 분위기도 달라졌고 복합상영관으로 스크린 수도 8백개로 늘어났다.우리 영화를 봐야겠다는 애국심도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한국 영화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났다.
▶쿼터제가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다는데.
최=지난해 한국 영화 점유율이 40%를 넘은 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아니다. 올해 전국의 스크린 수가 8백개를 육박한다고 한다. 그런데 일정 일수를 강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예전에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블록버스터 영화에 소위 '장사 안되는'영화들을 끼워팔았던 불공정한 관행이 있었지만 이제는 한국 영화가 명백히 주도권을 잡은 상태다. 국내 제작자와 극장주간의 협상이 이뤄진 것이 그 증거다. 할리우드 직배사의 불공정거래 행위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단속하고 영화는 영화시장에 맡겨야 한다.
심=쿼터제를 폐쇄적인 제도로 봐선 곤란하다. 세계무역기구(WTO)헌장에도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공정한'거래를 실현시키기 위한 일종의 룰이다. 할리우드가 세계 시장의 85%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영화계가 공정한 경쟁을 하려면 최소한의 보호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차이를 인정하듯 공정한 경쟁을 위해 한국 영화의 상영기간을 보장하고 나머지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백46일(최소 1백6일)의 의무상영일은 '최소 일수'인가.
심=지난해의 성장을 곧장 쿼터제 축소·폐지로 연결지어서는 안된다. 국내에 메이저 제작·배급사가 생긴 지가 3년밖에 안됐고 그것도 명필름·튜브엔터테인먼트나 CJ엔터테인먼트·씨네마서비스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역량이 지속 가능한지가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최소 5년은 지켜봐야 지속성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런 환경이라면 최소한 5년은 지켜봐야 한다. 쿼터제 폐지는 세계 영화시장에서 할리우드의 점유율이 50%로 내려온 다음이라야 한다.
최=당장 폐지는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쿼터제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피해의식에서 이제는 해방될 때가 됐다. 스크린 쿼터제는 자국 영화 보호라는 측면도 있지만 60~70년대 표현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던 시대에 영화인들을 달래기 위한 타협책이기도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외자 유치 등을 고려할 때 무조건 기다리는 건 무리가 있다. 이미 1백46일에서 문화부장관·지자체장의 재량으로 20일씩을 줄일 수 있다. 그러니 1백6일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축소 가능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할리우드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따져 한국 쿼터제를 논하는 것은 비약이다.한국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따져야 한다.
▶쿼터제는 극장주들에게 손해인가.
심=극장주는 부율(수익을 극장주와 제작사가 나눠갖는 비율)에 따라 이익을 보장받고 있다. 오히려 지난 3년간 국산 영화로 인한 수익이 훌쩍 커졌다. 직배사가 기세등등할 적엔 위세에 눌려 극장주들은 황금 시즌에 할리우드 영화를 걸고 남은 날짜에 국산 영화를 걸었다. 올해 제작사들이 극장주들에게 부율을 외화처럼 5대5로 하자고 요구한 것도 한국 영화가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최=모든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를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가치로 여기고 있진 않다. 극장주가 상영할 영화를 고르는 자유를 제한당하므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건 사실이다. 극장주는 이익을 추구한다. 아무리 직배사가 끼워팔기를 강요하더라도 수익이 안나면 극장주가 이를 거부할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은 냉정하다.
▶자본과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운 세계화 시대다. '보호해야 할 자국 영화'의 정의는.
최=법적 정의가 없어 사실상 애매하다. 쏘나타가 인도에서 만들어질 경우 인도차냐 한국차냐 하는 논리와 비슷하다.서비스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영화내용·출연진·스태프 다 중요하지만 한국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심=국산 영화냐 아니냐의 기준은 제작 지휘권을 누가 갖느냐다. 단순화한다면 비용의 50% 이상을 투자해 콘텐츠의 내용·방향, 스태프 구성, 정서적 효과 등에 대한 컨트롤을 하는 이에 따라 국적이 정해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와호장룡'은 할리우드가 제작지휘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중국 배우들이 나와 중국어로 연기했지만 미국 영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가 기실 우리 영화인들의 고민이다.
사회=홍은희 논설위원

정리=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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