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거품에 도취… 빚 쓴게 화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주가 거품에 도취해 빚을 많이 얻어 쓴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주주·종업원·협력업체·채권자 등 모든 분들께 미안할 따름입니다. 벤처인들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벤처신화의 주인공에서 한 순간에 실패한 경영인으로 전락한 메디슨 이민화(49)전 회장.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집무실로 쓰고 있는 서울 대치동 메디슨 6층 디지털의료경영연구소에 나타난 전회장은 힘들고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기자가 촬영하려 하자 그는 "자숙해야 할 사람이 무슨 사진…"이라며 한동안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세간에 떠돌고 있는 이런저런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근거없는 이야기"라며 일축했다.
-경영실패의 원인이 뭔가.
"2000년 상반기 주가가 한창 올라갔을 때 메디슨이 보유하고 있던 상장·등록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5천억원이었다. 반면 당시 부채는 3천억원이었기 때문에 재무구조에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착시현상이었다. 1조5천억원 하던 것이 지금은 1천억원대로 주저앉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00년 초에 한글과컴퓨터 등 보유 주식을 팔아 부채를 갚자는 주장이 사내에서 나왔는데 코스닥에 충격을 줄까봐 머뭇거린 것이 결과적으로 실수였다. 이 부분은 주주에게 미안하다."
-부도가 난 상황은.
"부도 직전까지 한 제약사와 40억원 규모의 거래 협상을 하고 있었다. 협상하던 중 1차부도 소식을 들었다. 결국 협상은 깨졌고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1차 부도가 난 지난달 28일 오후 한국신용정보원이 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내리는 바람에 융통어음의 전환이 어려워져 또 한번 직격탄을 맞았다. 허둥지둥 뛰어다녔지만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29, 30일 실시되는 신주청약 대금이 들어오면 넘어갈 수 있다고 은행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메디슨의 한 직원은 28일 일반청약에 앞서 우리사주조합을 대상으로 실시된 신주청약에서만 20억원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메디슨 주식을 처분한 것은 부도를 예상한 행동이 아닌가.
"2000년 6월 주가가 하락하자 주가안정을 위해 자사주를 매입했는데 이때 자금 마련을 위해 주식을 담보로 은행에서 20억원을 빌렸다. 그런데 주가가 계속 떨어져 은행이 담보부족이라며 환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래서 14억원어치를 팔아 9억원은 대출을 갚고, 5억원은 회사 운영자금으로 썼다."
-현재 남은 재산은.
"오늘(1월 31일)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아파트를 팔아 빚을 갚았지만 아직 6억원의 부채가 남았다. 당분간 현재 집에서 월세로 살 예정이다. 메디슨 주식(지분율 3%)이 있지만 이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나머지 재산은 없다. 15년간 회사를 경영하며 빼돌린 회사 돈은 맹세코 한푼도 없다. 나는 나이 쉰이 되기 전에는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었고, 차도 직접 운전하고 있다."
-그동안 주장해온 '벤처연방제'모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가.
"메디슨의 실패를 벤처연방제의 실패로 연관짓지 말아 달라. 관련 업종으로 다각화하는 것은 벤처의 대세다. 메디슨의 연방기업은 모두 의료 분야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재벌과 다르다. 다만 그 다각화의 수단을 차입에 의존한 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대외활동이 지나쳤던 것 아닌가.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을 맡아 5년간 활동하며 벤처정책의 틀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지나친 대외활동이 회사경영에 누가 된 것을 인정한다. 기업인은 기업 위주로 생각해야 했는데, 정부에서 나서야 할 정책수립에 너무 신경썼던 것 같다."(그는 '오버했다'는 표현을 썼다.)
-회장이 관여한 현재의 벤처정책이 각종 게이트를 부르지 않았나.
"각종 게이트는 벤처정책 탓이 아니다. 이용호·정현준·윤태식 등은 벤처인이 아니라 기업사냥꾼 혹은 불법로비꾼일 뿐이다. 모든 제도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벤처정책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눈부신 벤처의 발전이 가능했겠는가. 벤처 육성 정책의 대표격인 벤처확인제도는 벤처의 압축성장을 위해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일부 벤처의 탈선을 빌미로 벤처 지원을 포기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벤처정책은 실보다 득이 많았다. 물론 앞으로의 정책은 직접 지원에서 시장 인프라를 구축하는 간접 지원으로 변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자금은 얼마나 받았나.
"메디슨 초창기에 기술개발자금을 받은 것이 도움이 됐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의존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메디슨 관계사는 국내 의료산업 부문에서 수출의 65%, 국내매출의 50%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회사가 받은 정책자금은 의료산업계에 지원되는 전체 정책자금의 20%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메디슨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지만 법정관리를 통한 정상화를 낙관한다. 기술력이 세계 최고수준인 데다 지난해에는 매출 대비 10%가 넘는 영업이익을 낼 정도로 수익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자숙하겠다. 한 1년 쉬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써볼 생각이다. 재기를 말하기엔 아직 이를 뿐더러 마음이 너무 혼란스럽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전회장은 은행권에 대해 섭섭함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은행이 모든 부채에 담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부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무담보 대출로 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하이닉스 등 일부 대기업의 경우와 비교해도 너무하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후배 벤처인들에게 "은행과의 거래에서 신용대출을 늘리는 것이 안전하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글=이현상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