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지방’이 실종된 지방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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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하지만 실제 선거 결과는 어떠한가? ‘여당의 패배, 야당의 약진’으로 압축된다. 그러자 정치 전문가들과 언론이 다시 나서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전망하던 때와는 정반대의 논리로 실패 이유를 분석했다. 당연스레 북풍의 힘에 기대었던 한나라당의 안이함이 오히려 역풍(逆風)을 만났고, 잠재되어 있던 노풍(盧風)의 저력을 무시한 결과로 주요 승부처를 맥없이 잃었다는 것이다. 세종시와 4대 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현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와 반MB정서가 여당 패배의 주원인이라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불만을 6·2 지방선거에 표출한 유권자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지역의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인물보다 정당을 보고 뽑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현 정부에 대한 분노가 컸던가?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정 정당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조차도 이번에는 인물 대신 정당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아주 황당한 선거였다는 감회를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유권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괴로운 선거였다.

선거 당일 아침 족히 몇 십장은 되어 보이는 선거공보를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종류별로 분류하고 나서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려고 하니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서울시장 후보 5명, 구청장 후보 4명, 서울시의원 후보 2명, 구의원 후보 5명, 서울시의회의원 비례대표 정당 10개, 구의회의원 비례대표 정당 2개, 서울시교육감 후보 7명, 서울시교육의원 후보 3명. 서울시 광진구 주민으로서 검토해야 할 공보가 총 38가지였다. 한 후보의 공보에 실려있는 내용은 또 얼마나 많은가. 10가지의 과거 업적, 20가지가 넘는 새로운 정책, 간간이 삽입된 도표와 사진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학력과 경력…. 이 모든 정보를 읽고 이해하고 비교 검토해 가장 훌륭한 인물을 뽑는 일은 무척 난망해 보였다.

유권자는 누구나 후보자의 외모나 성격 같은 막연한 이미지나 소속 정당보다는, 자질과 능력 그리고 비전과 정책에 근거해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후보자의 정책 하나하나가 믿을 만하며 실현 가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각 후보자들의 주요 정책들이 서로 달라야 유권자들은 그 차이를 비교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한 후보 당 20개가 넘는 정책을 제안하고 있을 뿐 아니라, 후보 간 정책도 비슷비슷한데 어떻게 좋은 인물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투표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속 정당을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쓴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수록 많은 정보를 탐색한다. 하지만 의사결정 환경이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어려울 때에는 오히려 반대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처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순간 떠오르는 직관이나 스쳐 지나가는 느낌과 이미지, 선호나 분노 같은 개인 정서에 의존해 선택을 하거나 아예 선택을 포기하기도 한다. 특히 중요한 사항을 결정해야 할 때에는 정보를 더욱 꼼꼼히 보고 주의 깊게 처리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이는 정보처리를 방해한다. 결국 정보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 상황은 좋은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속 마음이 불편한 것은 내가 뽑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아서도 아니고, 선거결과가 흡족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뉴스와 신문기사가 선거 결과의 의외성과 이에 따라 중앙정치계에 불어 닥칠 후폭풍에 대해서만 논할 뿐이지, 당선자들이 자치단체장으로서 가장 적절한 인물인지 혹은 함량 미달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이 없다. 6·2 지방선거 당선자들이 지역 특성에 가장 잘 맞는 최선의 정책을 개발하고 지역 발전을 극대화시키는 본연의 임무 대신, 현 정권에 대한 견제로 4년을 보내지 않을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성영신 고려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