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4 문화 키워드] 학술 - 대중독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 옛 소련이 붕괴된 후 한 시민이 쓰러뜨려져 방치된 독재자 스탈린의 동상 위에서 비를 들고 청소하고 있다. ‘대중독재론’은 소수 독재자의 억압과 독재에 대한 다수 대중의 자발적 동의간의 관계를 규명해야 진정한 ‘역사의 청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04년은 '역사의 해'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인해 한.중 간 '역사 전쟁'이 벌어졌고, 국내에선 친일진상규명법안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역사 인식과 관련해 올해 한국 학계를 관통한 키워드는 '대중독재'. 임지현(45.한양대.서양사) 교수가 지난 4월 펴낸 '대중독재-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책세상)에서 제기한 조어(造語)다. '소수의 독재자=가해자=악(惡)''다수의 대중=피해자=선(善)'이라고 여겨온 기존의 이분법을 해체한 파격의 단어였다. 대중독재는 한마디로 '대중의 동의 위에서 유지된 독재'라는 의미다.

대중독재론은 20세기 독재 전반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소련 스탈린주의, 그리고 한국 유신체제 등 좌.우파 독재가 모두 도마에 올랐다. '독재의 강도'의 편차보다는 독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 것이다.

"대중이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소극적 대중이 아닌 것이죠. 적어도 20세기의 독재는 소수 독재자의 강제와 대중의 자발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대중독재론의 관점으로 보면, 소수의 독재자를 단죄하는 정치적 과거 청산은 진정한 과거사 정리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대다수 '공범'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는다. '독재의 뿌리'를 남겨놓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민의 뜻'은 헌법을 만드는 초월적 권력"이라는 전제 아래 대중독재론은 주권을 가진 대중이 역사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대중독재론은 대중 모두의 '내 탓이요'를 요청한다.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성찰이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역사의 청산이 가능하고 나아가 미래의 또 다른 독재와 파시즘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비판'의 선봉장이기도 한 임 교수는 "독재자가 대중을 동원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라고 지적했다.

"민중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대중독재론의 칼날은 이른바 '민중적 도덕주의'를 정조준하고 있다. 여기엔 민중의 저항을 기반으로 역사의 일직선적 발전을 신봉하는 진보사관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대중독재론은 20세기 근대적 가치를 근본에서부터 회의하며 절대선을 부정하고 가치 상대주의를 내세운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대중독재론에 대해 "독재의 책임을 왜 민중에게 전가하는가" "민중을 단죄하고 독재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시도""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근본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즉각 쏟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택현(성균관대.사학) 교수는 "'대중독재'란 용어만 새로울 뿐 기존에 다 나왔던 내용"이라며 "독재자는 강제와 설득을 동시에 구사하고, 피지배자 측면에선 협력과 저항의 두 양상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지배-종속 관계의 일반적 메커니즘인데, 피지배자의 협력만 부각시킨 대중독재론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추상"이라고 비판했다.

김동택(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정치학) 교수는 "임지현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국가가 국민국가인 오늘날 우리는 모두 대중독재 아래서 살고 있는 셈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현실 정치의 단순성을 감안할 때 전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보여준 과거 청산 정도라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택현.김동택 교수의 반론은 곧 출간될 학술지 '역사와 문화' 겨울호에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이들의 반론에 대해 임 교수는 "독재의 유산을 극복하는 첫 걸음은 설익은 도덕주의가 아니라 대중들이 근대화의 물질적 풍요를 좇아 독재에 자발적으로 동의한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재차 반박했다.

임 교수는 20세기의 독재 문제를 전문으로 다뤄온 영국의 학술지 '전체주의 운동과 정치 종교'가 2005년 특별호로 펴낼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편집인으로 초청됐다.

배영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