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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DJ의 끝없는 온정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현 정권의 온정주의적 국정운영 행태는 정말 끝이 없는 것 같다. 29일 발표된 개각과 청와대 비서진 개편내용을 들여다봐도 그렇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과거부터 '내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인 듯하다.

*** 능력앞서 오랜 인연 중시

물론 이번 개편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이해하는 쪽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오죽 답답했으면 청와대의 수석급 이상 9명 중 7명이나 바꾸었겠느냐"고 호소한다.

박지원씨를 특보로 기용한 것도 "지난해 11월 그가 물러난 뒤 대화나 협의할 상대조차 없었던 金대통령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한동 총리의 유임에 대해서는 "국회의 인사청문회와 임명동의를 거쳐야 하는 절차상의 어려움을 감안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인사는 金대통령 특유의 온정주의가 또 다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정권 핵심에서는 간간이 "李총리가 지난해 9월 DJP 공조가 깨질 때 자민련에서 출당되면서까지 내각에 잔류한 데 대해 대통령이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지난해 민주당 최고위원들이 인적 쇄신을 요구할 때 박지원씨는 자진사퇴해 대통령의 행보를 가볍게 해준 데 대해 DJ가 늘 안타까워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박선숙공보수석의 경우도 능력과는 별개로 金대통령과의 오랜 인연이 작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金대통령의 이런 인사행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권 출범 후 자리를 맞바꾼 인사가 이미 몇차례 있었다. 쓰던 사람을 버리지 못해 말썽이 됐던 경우도 적지 않다.옷 로비 의혹사건 때 김태정 검찰총장을 끝까지 감쌌다가 곤욕을 치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3월 안동수씨를 법무장관에 기용했다가 사흘 만에 퇴진시켰을 때 金대통령이나 동교동계 일부에서는 야당시절을 회고하며 "괜찮은 사람"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런 온정주의는 동교동계 인사들에게는 익숙하다. 지난해 대통령의 처조카 이형택씨 문제가 처음 제기됐을 때 동교동계 출신 모 국회의원은 "그 사람 고생했는데…"라며 오히려 옹호했다. 현 정권 중심세력의 '동지'또는 '식구'가 문제될 때마다 흔하게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이런 분위기를 알기에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형택씨의 부탁에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일부 청와대 수석들이 동교동계 실세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과 사귀는 일에 몰두한 것도 이런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민주화투쟁 시기를 거치면서 그렇게 똘똘 뭉치지 않았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나서도 이런 폐쇄적인 '이너서클'을 형성해 그들과 관련된 각종 비리정보가 입수돼도 묻어버리거나 '너그럽게' 넘어간 것이 오늘의 위기를 초래했다.

구속된 신광옥 전 민정수석이 청와대의 확인전화에 "결코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한 것이나, 동생이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되는 바람에 옷을 벗어야 했던 신승남 검찰총장이 한때 완강히 버틴 것도 "金대통령의 온정주의적 인사행태를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 책임 안지려는 풍토 생겨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정동영 의원과 유종근 전북지사는 "대통령이 당과 국정을 온정주의적으로 이끄는 바람에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개각을 보면 이들의 애정어린 충고조차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런 지적을 하는 것조차 거둬들여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안타깝다.

김두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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