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온 러시아 '국보급 연출가' 긴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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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15~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화두로 삼았다.

"사할린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 사는 카레이스키(한국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낯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장 모퉁이에서 빨간 토마토를 팔던 가난한 노파와 그 옆에서 졸고 있던 꼬마. 그 추운 겨울에 이들은 어떻게 토마토를 가꿔 시장에 가지고 나왔을까. 당시 소련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은 했다. 기적이었다."

그의 별난 기억에 대한 회상은 계속됐다.

"당시 카레이스키들은 '비자'가 없었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나 모스크바로 여행할 수가 없었다. 소련 국적의 사람과 결혼해야 여행도 가능했다."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카마 긴카스(61)가 처음 한국을 찾아 털어놓은 한국인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는 최근 LG아트센터 초청으로 내한했다. 오는 8월 선보이는 그의 연출작 '검은 수사(Black Monk)'의 공연 준비를 위해서다. 한국의 스태프도 만나고 공연장도 둘러보는 게 목적이다. 지난 28일 그와 단독 인터뷰했다.

당초 한국인에 대한 그의 기억은 '이색적'이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호감이 내포돼 있음이 분명했다. "카레이스키는 강인한 인내력과 지혜가 넘쳤다."

비극적인 역사에서 배태된 소수민족에 대한 이런 특별한 관심과 따스한 눈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그것은 내가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보일 의무가 있다. 그것은 러시아 지식인의 전통이다."

긴카스도 러시아의 소수민족 출신이다. "나는 유대인으로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한 러시아의 연출가다." 삶 자체가 이처럼 모순투성이인 존재. 그의 연극은 바로 이런 '비극적 역설(tragic paradox)'의 토양에서 자랐다.

그의 대표작인 '검은 수사'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희곡 '세자매''갈매기' 등을 남긴 체호프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상징적 인물.

그러나 '검은 수사'는 그와 정반대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촉망받는 30대 학자 코브린이 검은 수사를 만나면서 영감과 행복을 얻지만 결국 파멸하고 마는 이야기다. 코브린은 비극적 역설의 전형이다.

긴카스는 이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세계 초연했다. 방식은 혁신적이고 전위(아방가르드)적이었다.

극장의 객석과 무대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파격적인 공간연출(LG아트센터도 마찬가지여서 1,3층의 좌석은 모두 비워둔 채 연기공간으로 활용되며 객석 2층의 2백석만이 관객에게 개방된다)과 고도로 훈련된 배우들의 연기는 러시아 현대(컨템포러리)연극의 흐름을 드러내는 아이콘으로 통한다.

"발레.오페라와 달리 연극은 '의미'가 절대적이다. 감성적인 의미로 관객의 마음을 헤집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의 연극이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감성과 의미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은 텍스트(대본이나 원작)를 보는 남다른 관점에서 비롯했다. "연출은 텍스트와 겨루는 일종의 게임이다."

그래서 연출 방식에 따라 같은 '헬로(Hello)'라도 관객들에게는 얼마든지 다른 뉘앙스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미묘한 겨루기를 통해 감성과 의미를 함께 고양하는 게 연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일찍이 스타니슬라프스키.메이어홀드 등 걸출한 연극 연출.이론가를 배출했다. 어느 편의 계보에 서느냐고 물었더니 긴카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내 연극의 스승은 38년 동안 곁에 있는 아내다."

그의 아내 겐리에타 야노프스카야도 그와 견주는 세계적인 연극 연출가이며 '검은 수사'를 만든 모스크바 '젊은 관객의 극단'의 대표다. 둘은 1990년대 후반 아비뇽연극제 등에서 두각을 보이며 세계 무대의 정상에 섰다.

정재왈 기자

*** 카마 긴카스 약력

▶1941년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집안에서 출생

▶67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예술원 졸업

▶67년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트래디치오나야 브스트레차' 로 연출 데뷔

▶81∼87년 모스크바로 이주,모스크바예술극장 ·모소베타극장 ·마야코프스키극장 등에서 연출 활동

▶88년∼현재 모스크바 '젊은 관객의 극장' 연출가로 활동

▶97년 프랑스 아비뇽연극제에 '죄와 벌'을 각색한 'K.I.from Crime'를 출품,세계적인 연출가로 인정받음

▶2000년 러시아 국가연극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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