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학습 부진아를 위한 대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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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떤 아이도 낙오되지 않게(No Child Left Behind)'.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올해 초 서명한 공교육 개혁법 제목이다. 교육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온 부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이 법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담고 있다.

각 주(州)정부는 공립학교 3~8학년 학생의 읽기와 수학에 대해 2005년부터 매년 의무적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를 학부모에게 통보해야 한다. 이 시험에서 학교의 평균성적이 2년 연속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학부모는 교육당국에 자녀의 전학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때 통학비용은 당국이 부담해야 한다.

만약 3년 연속 수준에 미달할 경우엔 성적이 나쁜 학생들에게 보충수업비나 과외비까지 줘야 한다. 더 나아가 4년 연속 적정수준 달성에 실패한 학교는 교직원 교체, 학교 경영권 축소 등 제재조치가 뒤따른다.

부시 행정부는 올해 공교육 예산을 지난해에 비해 49% 늘리고 교육재원 활용에 지방정부와 학교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더 많은 예산과 재량권을 주면서 학생들이 학업 성취기준 달성에 실패할 경우엔 엄격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다.

이 법은 미국이 공교육의 질 저하를 방치해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1965년 초.중등교육법 제정 이후 공교육 개선을 위해 1천3백억달러를 투입했으나 계층간.집단간 학력격차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의 경우를 보자. 펜실베이니아주 정부가 지난해 필라델피아 지역의 공립학교 재학생 21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읽기.쓰기.셈하기 평가에서 57%가 탈락했다. 제11학년(고2 해당) 학생 가운데 단지 13%만이 신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매년 정학을 받는 학생이 6만5천여명에 달했다. 학부모들의 책임 추궁에 따라 지난해 말 대대적인 공교육 개혁에 나선 주정부는 필라델피아 교육구의 고위직 55명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민간인 전문가를 앉혔다. 또 성적이 아주 나쁜 60개 학교는 운영권을 기업체나 교회.대학에 넘겨 민영화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독일.일본 등에서도 학생들의 학력격차 해소와 공교육 질 향상을 위한 교육개혁이 한창이다. 계층.인종.집단간 교육격차가 지속될 경우 사회통합을 해치고 결국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떤가. 최근 교육부가 내놓은 전국 초.중.고교생 2만9천명 표본 학력평가 결과를 보면 몇가지 우려할 만한 분석이 나온다. 전체 학생의 36%가 보통 미만의 학업성취 수준에 머물고, 특히 4.7%는 기초학력 미달자로 나타났다. 기초학력 미달자 비율은 초등 1.1%에서 중학 5.5%, 고교 2학년 6.2%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지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도 심하게 벌어졌다.

이같은 기초학력 미달자 비율을 전체 초.중.고 학생수에 대입하면 25만명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정확한 실태는 아무도 모른다. 체계적인 학업성취도 평가가 이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역.학교별 격차가 드러날 경우 부작용이 생긴다는 이유로 평가결과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습 부진아에 대한 교육환경과 지원도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학력차가 극심한 학생들이 한 교실에 뒤섞이다 보니 우수 학생은 그들대로 불만이고, 학습 부진아는 학력 보충기회도 없이 상급학년으로 진급해 더 낙오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교실 붕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국가인적개발 기본계획에서 2005년부터는 학습 부진아를 국가가 책임지고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또 올해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한 7차 교육과정이 고교 1학년까지 확대된다. 이제 우리나라도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를 정례화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 대책을 세우도록 법제화하는 일을 서두를 때가 됐다.

한천수 <사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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