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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세상월령가 12월] 서해 낙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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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이종구 작, 서해낙조, 43×73㎝, 종이에 파스텔, 2004.

또 한 해를 보내는 시간이다. 서해 선유도에 간다.

1951년 1월 군산 째보선창에서 두 폭 돛을 올린 일중선을 타고 부산으로 떠나는 피란길에 올랐다. 아우성을 뒤로 한 네 가족이 그 배에 탔다. 판사 두 가족과 대법원 행정처 간부의 가족 그리고 아버지와 중학생인 나였다. 찹쌀가루 한 자루를 비상식량으로 휴대했고 비상금도 옷 속에 넣어 봉했다.

겨울 서북풍은 힘껏 바다 표면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배는 파도 위에 쿵쾅 내던져졌다가 파도 밑 깊숙이 파묻히다가 했다. 심한 멀미를 앓았다. 토하고 토했다. 늘어졌다.

비응도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사흘을 머문 뒤 다시 고군산군도로 향했다. 돛폭 하나가 파도 덩어리에 맞아 찢어졌다.

가까스로 선유도 선착장에 내렸다. 그곳에서 난청의 라디오에 귀 기울였다. 중공군은 오산 부근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산행을 단념하고 떠나는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엔군이 서울을 재수복한 뒤에야 섬의 피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의 세월 53년 만에 나는 현재로서의 회한과 과거로서의 추억을 가지고 선유도에 가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며칠 걸려 가던 험한 피란길이었으나 이제 2시간으로 충분한 통통배를 탔으니 뱃전에 나와 가슴 가득히 바다의 기운을 들일 수 있었다. 바다는 생명의 본적지이다. 나는 그 생명 근원의 기억할 수 없는 고향을 어렴풋이 헤아렸다.

마침 바다는 드물게 '신사파도(紳士波濤)'였다. 파도가 있으나 있는 듯 없는 듯했다. 그런 바다를 건너가자 아무런 위엄도 갖추지 않은 조혼(早婚)의 어린 아낙 같은 모습으로 선유도가 거기 있었다.

순한 쌍봉낙타인 듯 두 봉우리로 된 선유도 망주봉 한 쪽에 성큼 올라가 본다. 저 아래 진말 서쪽 명사십리는 지난 여름의 피서인파가 벌인 법석을 접고 고즈넉하다.

고군산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은 저희들끼리 한 고장을 이루고 있다. 선유도와 장자도는 다리로 이어져 아예 한 마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일대의 바다 위에는 68개의 섬이 있다. 그 가운데 49개가 무인도이다. 서로 다닥다닥 붙은 상태여서 건너 섬에서 밝힌 등불로 이쪽 섬에서 제사를 지낼 만하다. 저 한반도 백두대간 오대산쯤에서 가지를 쳐 달리는 것이 치악산을 이루고 그것이 차령산맥으로 벋어나가다가 서해 바다 밑으로 들어간 줄기로 이어지다가 다시 솟아난다. 그것이 고군산군도이다.

선유도는 여러 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황금어장인 칠산바다의 어업 때문만이 아니다. 옛 수군절제사가 주재하는 국가 해상방위의 군산진이 바로 이 섬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 군산진이 뒤에 육지로 옮겨지므로 이곳은 고군산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의 수적들이 자주 출몰한 곳이므로 고대 이래로 고충 어린 안보의 전초기지였던 이 섬은 한대(漢代)에는 중국 망명세력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당대(唐代)에는 백제를 치는 당군이 덕적도와 이곳 선유도 일대에서 상륙병력을 정비했다.

선유도는 선유8경을 말한다. 그 여덟 경치 중에 '선유 낙조'가 꼽힌다. 과연 이 섬의 망주봉에서 해 지기 전의 낙조는 인간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심미(審美)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루의 끝은 이렇게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해 지는 곳이 어찌 이곳뿐이겠는가. 어찌 서해뿐이겠는가.

한반도 동해 난바다에서도 백두대간 등뼈 너머로 지는 해의 낙조는 장관이다. 그 산줄기에서 동해 쪽으로 물이 흐르므로 옛 사람들은 그것을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라 했다. 그 물은 투명하고 이끼가 끼지 않는다. 외금강 외설악의 물이 맑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주요 하천은 거의 동에서 서로 흘러가 서해에 접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해는 남해와 함께 한반도의 모든 물과 삶의 흔적들을 다 받아들이는 하나의 거대한 종합이다.

그래서 동해는 예술의 전당이라면 서해는 삶의 마당인지 모른다.

이런 서해 일대의 일몰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 함께 한다. 그래서 서해 낙조에는 인간 서사의 여러 요소가 잠겨 있는 것이다.

어디 하나 막아설 것도 없는 창망한 바다 수평선 그 위와 아래 전체를 낙조로 채워 거기에 하루를 마친 사람의 흉금에 무늬진 애조가 더할 때 그 낙조의 순간순간은 한층 더 현란해진다.

감히 어떤 예술이 이 낙조를 흉내낼 수 있는가. 그 예술이 흉내낼 수 없기에 낙조의 저편에서 자신의 예술을 독립시키는 것이 아닌가.

지난날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운 시절의 한 소년이었던 내가 보았던 낙조의 기억은 더듬어지지 않았다. 이제 새삼스럽게 만나는 이곳 낙조의 절경은 늦게 찾아온 나에게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풍경의 진정한 의미는 그 풍경에 감정을 더할 때에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는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낙조는 이 세상 최후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군산 일대와 고군산군도에는 고대 최치원의 탄생설이 있다. 실지로 그의 시호 문창(文昌) 그대로 문창리가 있고 문창초등학교가 있다. 고군산군도 여러 섬에도 그가 한 시기를 머물렀던 흔적이 있다. 이 섬에서 그가 글을 읽는 소리로 바다 건너 중국의 학도들이 글을 배웠다 한다.

한일합방 직후에는 유학자 전우(田愚)도 이 섬으로 건너와 계를 설립하고 섬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들도 이 바다의 낙조에 얼얼하게 감동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가르친 것보다 그들 자신이 이 바다로부터 배운 바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나도 낙조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말도 의식도 다 두고 온 자의 넋이 필요했다. 낙조에는 수많은 넋의 찰나들이 들어있다.

이 낙조 전체가 밤의 시간에 묻혀버린 다음 날 나는 내 삶의 현장인 육지로 가야 한다. 그 육지가 끔찍하다.

내가 돌아갈 사회는 무엇인가. 내가 돌아가서 살아야 할 국가는 지금 어떤 것인가. 해가 뜨는 아침의 희망도 해가 지는 저녁의 회한도 다 오염된 인간의 발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나만이 있고 나의 이익만이 정당하고 다른 신념은 모두 나의 신념의 적이 되는 그 증오가 세상의 힘으로 행사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현대사의 격동은 그 현대사를 사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는 반면 사회는 점점 더 천박해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희로애락을 통해서 쌓아온 삶의 신성성이 자주 모독당하는 것이 낯익은 일상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사회는 경쟁과 연예의 척도로 말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나는 누구의 진지한 이웃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누구의 진실에 다가선 적이 있는가.

한 해를 보낸다. 보내고 난 빈 터에 새해는 무엇으로 오는가.

◆고은의 세상월령가는 12월치를 끝으로 1년간의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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