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옷은 내 브랜드" 서울대 괴짜 '파란도깨비' 이창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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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대에서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잠바ㆍ티셔츠ㆍ양말ㆍ신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파란 색만 걸친 그를 사람들은 ‘파깨비(파란 도깨비)’라 불렀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외모 덕분에 그는 서울대의 명물이 됐다. 1988년 철학과에 입학한 그가 2008년 박사 학위를 받고 지난해까지 서울대 강의를 맡아왔으니, ‘전설의 파깨비’는 20년이 넘게 서울대에 ‘출몰’했던 셈이다.

그런 그가 활동 무대를 옮겼다. 최근 경기 성남시 경원대의 교직원이 된 것이다. 27일 대학에서 만난 이창후(41)씨는 파란색 양복을 입고, 하늘색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와이셔츠는 흰색이었지만, 양말과 구두는 온통 파랬다.

“파란색 구두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는 예상했다는 듯 짧게 받았다.
“ 파는 데 많아요. 다들 안 사니까 없는 줄 알지.”

그가 파란색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풍수지리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파란색 옷을 입는 것이라는 설이다. “편집증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심지어는 청학동에서 와서 그렇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정작 그가 밝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때가 안타서”라는 것이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파란색 옷만 입는다고?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그러지 마시고 진짜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그는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라니까요. 파란색 옷만 입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요? 사람들이 나를 특이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꾸 얘기만 만들어 내서…”


파란 양말에 파란 구두를 신고, “난 평범한 사람”이라며 억울하다는 듯 말하다니. 그는 파란 옷을 처음 입었을 때 얘기를 털어놨다.

“대학 붙고 서울에 올라와 싸구려 파란 옷을 샀어요. 당시 노점상에는 그런 게 많았죠. 다들 그런 거 어떻게 입냐고 하지만 원래 남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상관 없었어요. 옷 사러 가는 것도 귀찮고 하다보니까 계속 한 옷만 입게 된 거죠. 그러다보니 의도치 않게 알려져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그는 그 때 구입해 20년 넘게 입은 파란색 바지와 티셔츠 두 벌, 파란색 잠바, 그리고 강의를 하게 되면서 구입한 파란 양복이 현재 가지고 있는 옷의 전부라고 했다.
“옷 좀 사지 그랬어요?”
“기숙사에서 살다가 나가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으니 짐이 많으면 거추장스러웠죠. 옷은 단벌로 책도 한 가방에 넣을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있다보니 파란 옷만 입게 됐어요.”

그는 말하는 내내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강변했다. 다만 남보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고 옷 사는 것을 귀찮아할 뿐이라고 했다. 평범한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은 진실돼 보였다
.
그는 ‘파깨비’로 국내에 알려졌지만 외국에서는 ‘마스터 블루’로 통한다. 한국에서 온 파란 옷을 입은 사범님. 공인 5단의 태권도 고수인 그는 매년 미국과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태권도 실전기술을 가르친다.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외국에 다녀봤는데 선진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에 다소 멸시가 섞여 있더라고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당하게 동남아 사람 깔보듯이 말이죠. 근데 문화가 알려지면 멸시당하지 않아요. 오히려 존경 받고 돈도 벌 수 있죠.”

그는 한국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자아실현과 연관된 일이라고 했다.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바꾸는 게 자아실현이에요. 문화를 통해 세계 중심 국가가 되는 게 한국의 자아실현이라고 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파란 옷을 입는 것도 중심으로서 돋보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그는 콘텐트 제작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애니빅’이라는 애니메이션 회사의 기획이사직을 맡아 태권도 만화를 만들고 있다.
“슬램덩크가 성공한 이유는 작가가 농구를 잘 알았기 때문이에요. 레이업슛을 쏠 때 ‘놓고 온다’라는 느낌을 설명하는 것은 교본만 보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태권도 만화도 마찬가지에요. 전문성 없이 만들면 공중에서 수십 회전 하는 발차기나 그리게 되죠. 이러면 재미있는 만화가 안 돼요.”

한국 문화 전도사로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본업은 철학이다. 서울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영미분석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는 서울대에서 ‘정보사회와 사이버윤리’ 강의를 맡아 왔다.

“처음에는 교수님들이 강의를 줄까 말까 걱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옷을 저렇게 입고 강의를 하면 위신이 떨어질까봐 우려하신 거죠. 그 때 한 교수님이 강의를 주자고 했답니다. 쟤가 강의를 한다고 파란색을 버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파란 양복을 입지 않겠느냐고 하면서요.”

앞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이창후씨. 그는 파란색 옷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이용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파란색으로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이 많으니, 앞으론 이를 브랜드 삼으려구요.”

권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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