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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김양은 즉시 자신의 무장인 김양순(金良順)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오래 전 무주에 살고 있던 악공인 하나가 해적노릇을 하다가 장보고대사 휘하의 군사에게 압송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김양순은 대답하였다.

"알고 있나이다.그 도적의 이름은 염문이라 하였나이다."

"그러하면 그 염문이란 자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소문에 듣자옵기로는 얼굴에 묵형을 받고 풀려났으나 숨어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그 이상은 잘 모르고 있나이다."

"그러하면."

김양은 명령하였다.

"그 염문이란 자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으며,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여라."

"알겠나이다. 도독 나으리."

김양순은 즉시 명령을 받고 사라졌다. 김양순은 김양이 무주의 도독으로 내려온 뒤부터 거느리고 있던 뛰어난 무장이었다. 도독은 원래 총관(總管)이라 불리던 지방 장관 중의 하나였으나 원성왕 1년인 785년에 도독으로 그 명칭이 바뀐 뒤부터는 강력한 지방 세력자로 부상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던 요직이었다. 따라서 무주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토호세력과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는데, 김양순은 개인 소유의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던 지방세력의 군장이었던 것이다.

도독 김양의 명령을 받고 염문의 동정을 살피고 돌아온 김양순은 김양에게 보고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그 염문이란 해적은 지금 성문 밖으로 물러나 용산현(龍山縣)에서 살고 있나이다."

용산현은 지금의 나주 북쪽으로 궁벽한 산촌이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백정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이다."

그곳은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들이 집단부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던 동리였다. 백정들의 뿌리는 원래 양수척(揚水尺)이라고 불리던 말갈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수렵생활에서 터득한, 짐승을 죽이던 기술을 살려 우마의 도살을 업으로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오나 나으리,그자는 화척(禾尺)의 무리에서도 따돌림을 받아 밖으로 나가면 백정들이 침을 뱉고, 심지어는 돌팔매질하여 쫓아내고 있을 정도이나이다. 다만 칼솜씨만은 좋아 도살할 때는 거골장(去骨匠)대접을 받아 육축(六畜)을 잡아 죽일 시에는 여기저기 불려나가 재살(宰殺)에 종사하는 것으로 간신히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나이다."

육축이라 하면 소.말.돼지.양.닭.개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예부터 귀족들은 자신들이 먹을 육류의 도살을 전문 화척을 불러다가 맡기곤 하였는데, 염문은 이렇게 부랑민 속에도 끼지 못하고 떠돌이 백정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김양이 묻자 김양순이 대답하였다.

"그뿐이 아니나이다, 나으리. 마침 소인이 찾아갔을 때에는 염문의 노모가 죽어 상중이었는데, 원래 죄수의 집안이라 하여서 매장도 하지 못하고 시신을 들판에 내다버려 들짐승이나 까마귀의 밥이 될 처지에 놓여있었나이다."

염문과 같은 대역죄인은 연좌형이었으므로 죄인의 가족은 물론 처첩까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양순의 말을 들은 김양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찾아가서 염문을 문상토록 하라. 죽은 시신을 함부로 들판에 버리지 않도록 하고, 제일 좋은 목관하나를 마련하여 매장토록 하라. 정중하게 장례절차를 치르도록 하고, 흰 상복을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라. 원한다면 가까운 절에서 부도 하나를 청해다가 독송케 하라. 그 대신 이런 모든 일들을 엄중히 비밀에 부쳐 절대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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