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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국가 과제] 1. 대통령, 제왕에서 CEO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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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다시피 하면서 상황을 장악하고 위기를 극복해 냈다. 그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참모들과 토스트를 함께 먹으면서 토론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대통령 앞에서 각료들이 몸둘 바를 몰라하는 경직된 지휘.복종 체제에서이같은 응전능력은 나올 수 없다.

민주당 문희상(文喜相)의원이 1990년대 초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文의원은 그리스 총리와의 만찬에 가자고 권유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고어 부통령이 자연스럽게 "조금 뒤에 가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文의원은 "부통령(고어)이 대통령(클린턴)과 나란히 걸어가며 동료처럼 토론하는 것을 보고 낯설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참모들과의 관계뿐이 아니다. 최고경영자(CEO) 대통령은 야당을 상대로도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미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 법안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일이다.국민을 주주로 여기고 야당을 견제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로 인식, 이들의 힘을 모아 국익을 창출하며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CEO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CEO 대통령은 이사회격인 내각을 이끌 때 '영도자(領導者)'로 군림하기보다는'조정자(調整者)'로 기능한다. CEO 대통령에겐 주주총회인 국회는 설득의 대상이다.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참모들과 공개적으로 협의하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화는 제왕적 대통령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우석(崔禹錫)소장은 "전설적인 CEO 잭 웰치(제너럴 일렉트릭 전 회장)는 무자비하기까지 한 구조조정 추진으로 '뉴트론(중성자탄)잭'이란 칭호까지 얻었지만 의사결정 과정만큼은 철저히 민주적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 AT&T 로버트 앨런(97년 퇴임)회장은 '조용한 혁명가'로 불렸다. 현대건설 회장으로 80년대 후반 뉴저지의 AT&T 본사에서 그를 만난 이명박(李明博)전 의원의 소개다.

"앨런 회장과 내가 합작 논의를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평사원 한명이 다가왔다. 이 직원은 '회장님. 네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요'라고 했다. 앨런 회장은 잠시 얘기를 듣더니 '오후 3시까지 내 방으로 오게'라고 즉석에서 면담약속을 했다. 그것을 보고 왜 조용한 혁명이 가능했는지를 알았다."

CEO는 의사소통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지휘계통'이나 '번문욕례(繁文縟禮)'를 없앤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담당 부서장에게 얘기하라고 돌려보냈거나, 아예 회장을 찾아오는 사원이 없었을 것"이라고 李전의원은 말했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96,97년 노동관계법과 금융개혁입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반대하던 야당의 김대중(金大中)총재조차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金전대통령이 택한 방법은 '새벽 날치기'. 그는 인심을 잃고,IMF 위기를 맞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경직되고 딱딱한 제왕적 시스템의 폐해를 걸프전 사례로 경고하고 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미국에 패한 이유로 창의력이 봉쇄된 문화를 꼽았다. 통신시설이 붕괴되자 위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한 이라크 병사들은 미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정책결정 과정이 밀폐된 '이라크형'이었다는 토로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핵심 경제참모였던 유종근(柳鍾根)전북지사는 "98년 2월 재계 판도를 바꿔놓는 빅딜정책을 발표할 때 대통령 경제스태프였던 나도 몰랐다. 지금도 누가 대통령에게 설득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최근까지 청와대에서 열린 각종 정책회의에 참석했던 한 경제각료의 푸념을 들어보자.

"아직까지 국무회의나 경제자문회의에서 장관들의 '받아쓰기'가 계속되고 있다. 일부 각료 사이엔 '우리나라의 정책은 베개'라는 은어(隱語)가 돈다. 가장 근자에 대통령을 사적으로 만난 사람의 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CEO 출신인 민주당 남궁석(南宮晳)의원은 의약분업이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CEO들은 어떻게 돼야 한다는 이상적 비전(투비 모델.To be Model)을 구체적으로 설정해 놓은 뒤 그곳에 접근하기 위해 하나 둘씩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나간다. 그러나 의약분업이란 중요한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우리는 새 집도 마련하지 않은 채 헌 집부터 부서버렸다."

물론 "국가경영에서 기업처럼 팀워크와 효율성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정치가 실종되고 행정관료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서울대 張達重교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정치 CEO는 공공부문의 공익적 특성을 무시하고 '이윤 극대화'라는 개념만 도입하지는 않는다. 정치 CEO는 '삶의 질 향상'이라는 부가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업 CEO와 다르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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