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이인표 에스콰이아 명예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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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3일 오전 80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인표(李寅杓)에스콰이아 명예회장은 한국 구두산업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새해 첫날 아들인 이범(李范)에스콰이아 회장의 세배를 받고 "직원과 협력업체를 먼저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다음달 갑자기 몸이 안좋다며 자리에 눕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른아홉살 때인 61년에 제화업을 시작했다. 그는 6.25 직후 문을 연 서울 명동 양품점에서 돈을 모았으나 5.16 군사혁명 정부가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자 양품점을 개조해 '에스콰이아'라는 수제화점을 냈다. 양품점에서 미 해군 단화가 불티나게 팔렸던 점을 감안한 것이다.

에스콰이아는 단화를 본따 만드는 데 급급하던 당시의 구두업계에 혁신적 디자인을 도입하고 최고급 가죽을 사용하는 등 차별화된 전략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수제(手製)에 머무르던 구두 제조방식을 대량생산 체제로 바꾸기로 결심한 것도 이런 인기 때문이었다.

"구두업계에서는 가히 '산업혁명'에 맞먹는 충격이었죠.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제화공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고인 옆에서 30년 넘게 일한 김학동(64) 전 에스콰이아 사장의 회고다.

자본금 1백50만환, 직원 열두명으로 시작한 명동 에스콰이아는 66년 3백평짜리 원효로 공장, 70년 1천2백평짜리 성수동 공장, 78년 연간 2백50만 켤레의 생산능력을 갖춘 성남 제2공장을 지으며 커갔다.

고인의 발자취는 사회사업에도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신없이 뛰던 그는 70년대말 과로로 쓰러졌다. 꼬박 두달을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미국의 카네기, 일본의 마쓰시타(松下)처럼 세상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세운 것이 서울 사직동 사회과학도서관과 국내외 22곳의 어린이 도서관. 고인은 도서관 운영비로 매년 10억원 이상을 내놓았다.

그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잠시 영화.출판업에 뛰어든 적도 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재계인사들보다는 문화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학계.문화계 인사들과 오히려 친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

직원들과 주위에 대한 고인의 배려는 대단했다. 에스콰이아 공장에서는 낮 기온이 섭씨 32도가 넘으면 자동휴무다. 일도 좋지만 건강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그의 지침 때문이었다. 심지어 "고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직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도 씻어내지 못할 아픔을 겪었다.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영난으로 2천2백명이나 되는 직원을 내보내야 했다.

"몇날 며칠 밤잠을 못 주무시더군요. 그 이후 40년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시던 사무실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지요."

2000년 1월 사업 지휘봉을 넘겨받은 아들 李회장의 말이다.

고인은 색동회상(92년), 문화훈장(92년), 독서문화상(95년), 지식경영대상(99년) 등을 받았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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