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의 제안] 송년식탁에 촛불을 켭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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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휑하니 가슴 뚫려 찬 바람만 숭숭 분다고요? 마지막 지는 노을같이 붉게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고요? 뭔가 빼앗긴 것 같고 억울하다고요? 그런 기막힌 한 해였지만 마지막날인 오늘 저녁 식탁에 촛불을 켭시다.

꼬리 문 자동차 불빛같이 빛이 강물처럼 직선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이 세월이 아닙니다. 너와 나, 우리가 동그랗게 켜놓은 촛불의 의미 있는 점.점.점들이 세월이고 역사 아닐까요.

제야(除夜)에는 노랗고 따스하고 둥그렇고 환한 촛불을 켜자고 중앙일보는 권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 촛불이 켜진 식탁에 가족과 연인과 친지와 함께 둘러앉읍시다. 촛불은 우리 모두를 감사할 줄 알고 소망할 줄 알며 경건해할 줄 아는 사람들로 되돌려놓습니다. 오늘 저녁은 그렇게 마음 가다듬기에 특히 좋은 때 아니겠습니까.

아직 살아 있고 건강하며, 가깝고 소중한 이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있음에 감사합시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기뻐하고 그리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파하고 슬퍼할지라도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지금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가 노력하면 더 나은 세상이 열리리라고 믿는 우리 자신들의 자존(自尊)에 무엇보다 감사합시다.

기도는 하늘에 비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닐까요. 촛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하늘하늘 타오르며 욕심 없이 제 영역만한 어둠만 몰아내는 초의 불꽃, 그것은 하늘의 뜻이며 순하고 착한 우리들 마음의 불꽃입니다.

촛불은 자신을 스스로 밝히면서 세상을 환하고 둥그렇게 껴안습니다. 아! 그래. 우리는 밝아올 새해를 위해 제야에 촛불을 켜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내년의 환함과 둥그런 포옹을 위해 우리 본디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촛불을 켜자고 했습니다.

자! 오늘 저녁 촛불을 켜고 둥그렇게 둘러앉읍시다. 올 한 해 이만큼 살아낸 것에 감사드리며 새 해에는 각자 촛불이 되어 각종 선거도, 월드컵도 밝고 원만하게 치러 좋은 세상 되게 하소서.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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