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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가격표 없어 … 맞춤 요리 서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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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니세’(老鋪).

일본에서 오래된 가게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대체로 창업한 지 100년 이상된 곳에만 붙인다. 이름 자체가 일종의 ‘훈장’이다. 도쿄의 스시 명가 ‘긴자 스시코’(銀座 壽司幸)가 그렇다. 1885년 세워져 4대째 스시 하나로 명맥을 잇고 있다. 번화가인 긴자 골목에만 300군데가 넘는 스시집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대를 이어 찾을 정도의 ‘골수’ 단골이 많다. 일본 왕실과 정·재계 인사들도 자주 들르는 곳으로 알려졌다. 2008년부터 3년 연속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됐다. 도쿄 음식점 16만 개 중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곳은 200곳이 채 안된다.

이 가게의 대표이자 조리장인 스기야마 마모루(杉山 衛·57·사진)씨가 한국을 찾았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본점 일식당 모모야마가 18~20일 연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의 단 한번 뿐인 기회’라는 뜻)라는 행사에서 스시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행사는 그의 명성을 듣고온 애호가들로 성황을 이뤘다.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래 가게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가게 경험이라고는 대학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가업을 잇기로 했던 큰 형이 1970년대 후반 병으로 갑자기 주저앉자 덜컥 가게를 물려받게 됐다(둘째 형은 일찍부터 회사를 다녔다). 스물다섯 나이에 후계자로 결정됐지만 주방에서는 밑바닥부터 배워야 했다. 주인집 아들이었지만, 주방에선 오랫동안 일해 온 선배들의 ‘군기 잡기’가 만만찮았다.

“주방은 분위기가 엄격해 많이 혼나면서 배웠죠. 목욕할 때 쓰는 물도 20여 명의 선배가 먼저 씻은 다음에야 쓸 수 있을 정도로 선후배 관계가 철저했으니까요. 1년 동안 청소만 했고, 2년차엔 채소를 다듬었습니다. 5년 째가 돼서야 밥을 짓게 됐습니다. 그렇게 배우며 10년 쯤 지난 뒤에야 제대로 된 음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명한 스시 가게가 그렇듯 이 집도 좋은 재료를 쓴다. 같은 업자에게 50년 이상 생선을 공급받고, 유명 농가에서 받은 쌀로 밥을 짓는다. 하지만 이 가게가 유명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맞춤 서비스’다.

“창업할 때부터 메뉴판과 가격표가 없었습니다. 대신 철저하게 손님의 취향에 맞춰 요리를 했습니다. 단골 손님 300여 명의 취향과 특징·기념일을 메모해 관리합니다. 손님의 체격에 따라 밥과 고추냉이·생선 양을 조절하는 건 기본이고요. 젓가락질이 서툰 외국인을 위해서는 일부러 초밥을 딱딱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김치 등 한식은 외국인이 처음 접할 때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외국의 20대 젊은 여성이 바로미터다. 이들이 거리낌없이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시가 ‘캘리포니아 롤’로 변신하면서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듯 메뉴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맛은 예전과 그대로 유지하도록 고집하되 선대와 달리 맥주를 곁들여 팔고 젊은 여성을 위해 스시에 걸맞는 와인도 추천하는 등 노력했다”며 “그 덕분에 외국인 손님이 30%쯤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사진 롯데호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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