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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마포를 추억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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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법 높은 지대에 살았던 터라 서강대교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좋았다.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밤이면 밤섬이 보이는 한강변에 나가 산책을 했다. 한강 둔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나날이 변해 가는 여의도 스카이라인을 무료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해마다 이맘때 양화대교까지 내려갔던 마지막 유람선이 여의도로 돌아올 시간이면 행주대교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속엔 싱그러운 아카시아꽃 향기와 함께 철 이른 여름 냄새가 실려 오곤 했다.

다소 감상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방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새삼 마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포는 이제까지의 서울살이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마포에서 나는 2002년과 2006년 두 번의 지방선거 투표에 참여한 바 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지방선거를 치른 지 벌써 15년이나 된다. 문제는 지방자치의 역사가 제법 진행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방선거가 갖는 의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일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대선과 총선이 주기적으로 교차하지 않는 우리의 정치일정상 지방선거는 자연 정권의 중간심판적 성격을 갖게 된다. ‘국정안정론 대(對) 정권심판론’이 으레 선거의 기본구도를 이루며, 인물과 정책은 이 구도 아래 구속받게 된다. 지방선거를 사실상의 중앙선거로 치르게 하는 이런 특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선거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 어떤 선거든 기성 권력에 대한 일종의 심판적 성격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주의 정치와 정당의 전략에도 문제가 있다. 특정 지역의 경우 정당 공천이 당선을 보장하는 지역주의 정치는 해당 지역 주민의 삶에 대한 생산적 정책 경쟁을 원천적으로 제한한다. 수도권의 경우에도 화려한 지방자치 공약들이 제시되지만, 집권 여당이든 야권이든 ‘국정안정론 대 정권심판론’으로 선거를 이끌어 가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문제는 지방선거가 이렇게 치러지는 한 정작 지역 주민의 ‘삶의 정치(life politics)’는 계속해 부차적 이슈로 남아 있게 된다는 데 있다.

이번 6·2 지방선거의 경우 출발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상급식 이슈가 의제화됐고, 충청권의 경우 세종시 수정 문제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정치적 이슈들이 활성화돼 왔다. 더불어 교육감 선거와 연동된 교육은 물론 주거·보육·노후 등과 같은 이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투표일을 일주일 앞둔 현재, 이런 의제보다는 북풍(北風)과 노풍(盧風)으로 대변되는 ‘바람의 정치’가 선거판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주는 엄중한 국가적 과제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가 갖는 추모의 의의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무리 선거 국면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정치적 득실로 계산되는 현실 앞에서 갖게 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무력감이다. 나의 주장은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본래의 의미를 돌아보자는 교과서적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일종의 균형감각을 갖자는 것이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지방선거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자기 지역의 일꾼을 뽑는다는 게 첫 번째 의미라면, 지방자치와 연관된 중앙정치에 대해 힘을 더해주든 견제를 강화하든 평가하는 게 두 번째 의미일 터다.

지난해 봄 9년 만에 다시 강을 건너 강남구로 이사를 오게 됐다. 아파트 단지 내 목련 꽃잎이 뚝뚝 떨어지던 날, 사다리차가 와 이삿짐을 내리고 잔금을 치르고 나서 막 떠나려고 할 때, 평소 무덤덤한 무채색 공간이었던 마포는 그 순간 마음 짠한 유채색 장소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포는 내게 말을,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회색빛 서울 하늘 아래 또 다른 공간으로 서둘러 유목을 떠나는 나는 멀어지고 작아지는 마포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