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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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 진실로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비록 내가 어려운 생활을 하고 비참한 존재였지만 난 나의 약속을 지켰어요. 나를 멀리 하지 말아 주세요."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생아에서 아르헨티나의 고귀한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던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흘렀다. 20세기 유명 여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에비타처럼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여자는 없다.

그런데 새삼 그녀의 죽음을 노래한 이 가사가 다시 아르헨티나 국민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슈퍼마켓의 창문을 부수고 상품을 약탈하던 영세민과 실업자들은 아직도 에비타의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폭발하는 듯한 탱고의 열정과 리듬도 사그라졌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5대 부국으로 불렸던 한 국가의 추락이 너무 순식간이라는 데 우리들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현지 언론보도에 따르면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인질극과 강도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다수의 범인들이 민가를 침입해서 신발까지 챙긴다. 경찰이 덮치면 범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가족행세를 한다.

인질극을 연출하면 도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고, 사건의 공개화로 목숨이 보장될 가능성이 커 같은 수법의 범행이 꼬리를 물고 있다. 범인들은 '직업도 없고 가난한 나를 너희들이 어떻게 할거냐'하는 버티기 작전이 관습화된 데서 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그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된 뒤 노동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노동관련법을 추진한 것은 순전히 에비타의 영향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곡물수출로 벌어들였던 엄청난 부(富)는 대중의 인기를 얻어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남자 임금의 93%까지 받았다. 그러나 페론은 1차산업 위주의 산업구조 개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추락을 알리는 신호였다.노동자들은 지금까지 특권을 누리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오늘의 비상사태하에서도 인질극이나 강도행각을 벌이는 범인들조차 정부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더 타임스는 아르헨티나 정부에 '한국을 배우라'고 충고했다.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뼈아픈 구조개혁 때문이라고 치켜세웠다. 정부와 기업.국민의 '고통분담'이 아르헨티나를 살리는 길이다.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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