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빈 라덴 놓쳤다"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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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다 잡은 것처럼 보였던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빈 라덴 체포가 임박했다고 장담하던 미군 관계자들은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라고 말을 바꿨다.

미 합참본부 존 스터플빔 대변인은 17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사흘 전까지만 해도 빈 라덴이 토라보라 지역에 있다고 확신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빈 라덴 추적 실패를 시인한 셈이다.

사흘 전인 14일엔 무선교신으로 알 카에다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빈 라덴의 육성이 포착됐다는 미 언론보도가 나왔었다. 포로로 붙잡힌 알 카에다 대원들에 대한 신문에서도 "빈 라덴이 토라보라에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미군은 그 무렵부터 첨단장비로 무장한 정예 추적요원을 긴급 투입, 토라보라의 동굴 진지와 터널들을 샅샅이 훑어 나갔지만 빈 라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현재 토라보라 일대에선 전투가 거의 멎은 상태다. 반(反)탈레반군은 알 카에다가 포기하고 달아난 무주공산(無主空山)을 차례차례 접수하고 있고, 고지대로 밀려난 알 카에다 잔당들은 산너머 파키스탄 국경 쪽으로 향하고 있다.

미 언론들은 "빈 라덴이 패주병들 속에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패주병의 숫자는 5백여명에서 많게는 1천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을 추적하자면 눈덮인 해발 4천m급의 산봉우리를 넘거나 험준한 계곡을 지나야 한다. 이 때문에 현재로선 공중폭격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파키스탄은 빈 라덴이 넘어올 경우에 대비해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으나 국경선이 길고 불분명한 데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빈 라덴 추적작전에서 핵심역할을 해 온 동부동맹 사령관 자히르는 현지에서 취재 중인 서방기자들에게 험준한 산악능선을 가리키며 "저기엔 수없이 많은 퇴주로가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 때문에 "빈 라덴이 이미 파키스탄 잠입에 성공해 국경 인근 부락에서 친 탈레반 파슈툰족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수중에 들어온 줄 알았던 빈 라덴이 사라지자 미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아라비아해에 보냈던 항공모함 키티호크를 철수시키는 등 끝내기 수순에 들어갔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전을 늦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빈 라덴의 신병확보야말로 이번 전쟁의 최고.최대목표였기 때문이다.

알 카에다의 우두머리 빈 라덴을 잡고 이어 중동.아프리카.동남아 지역의 알 카에다 조직을 차례로 궤멸시키겠다던 확전론도 멈칫거릴 수밖에 없게 됐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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