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기업 외국에 팔 때 계약 모호해 '뒤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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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환위기 이후 많은 국내 기업이 외국인들에게 팔렸다. 그러나 서둘러 매각하다보니 계약서에 모호한 조항이 있거나 계약서 해석을 놓고 판측과 산측의 의견이 달라 계약이 깨질 위기에 처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올 들어 국내외 기업들이 계약 불이행 등으로 분쟁 끝에 대한상사중재원에 낸 중재 신청이 1백91건에 이른다.

◇ 후유증 앓는 기업들=머큐리 컨소시엄은 대우통신의 정보통신 부문을 인수하면서 2000년의 이자나 세금을 내기 전 수익이 6백50억원 이상이면 머큐리가 대우에 3백50억원을 지급하고, 6백50억원 이하면 2백억원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해의 수익을 정산하는 방식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대우측 방식에 따르면 머큐리는 3백50억원을 대우에 줘야 한다. 그러나 머큐리측은 "미수금.부실 채권 등을 제하면 대우측에 줘야 할 돈이 없거나 오히려 받아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파츠닉(옛 대우전자부품)을 인수한 알루코는 잔금 지급을 늦춰 채권단과 분쟁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알루코측 관계자는 "실사 결과 1백90억원의 손실이 더 드러나 인수대금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금보험공사와 뉴브리지캐피털이 맺은 제일은행 매각계약서는 사전 두께의 책 5권 분량이다. 최대한 세세하게 꾸몄는 데도 양측이 계약서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결국 뉴브리지 캐피털은 지난 3월말 영국 런던의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A)에 중재를 신청했다.

예보와 뉴브리지측은 제일은행이 대우계열사에 해주었던 대출금의 처리문제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중재 대상 여신은 80여건,1조1천억원 정도다.

◇ 계약서 작성 때 분쟁가능성을 막아야=대구고법 목영중 부장판사는 "국내 기업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성과(매각)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분쟁의 불씨를 스스로 초래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목판사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추후 당사자간 합의나 해석에 따른다'는 등의 모호한 조항을 넣더라도 당장 매각을 성사시키려는 분위기가 강하다"면서 "협상.분쟁해결 전문가를 키우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중재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김모 변호사는 "외환위기 직후 대기업들이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서둘러 계열사나 사업부를 매각하면서 분쟁의 소지를 남겨 최근 국제중재사건이 늘고 있다"면서 "사후정산 방법이나 수익배분 등 세밀한 부분까지 계약서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사중재원 서정일 박사는 "국제 중재로 갈 경우엔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등 한국기업들에 불리한 경우가 많다"면서 "중재지를 애초부터 서울로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동섭.허귀식.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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