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테러범 사형 반대"…美와 신병처리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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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하나가 됐던 미국과 유럽의 동반관계가 테러범 처리를 놓고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형제도다. 오사마 빈 라덴은 말할 것도 없고 9.11 테러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테러범 중 상당수가 미국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공산이 크다. 특히 미국이 주요 테러범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할 계획을 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전 회원국이 사형제도를 폐지한 유럽연합(EU)은 테러범을 극형에 처하는 데 절대 반대다. 영국의 제프리 훈 국방장관은 "영국군이 빈 라덴을 체포할 경우 미국이 사형에 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신병을 인도할 것"이라고 공언했을 정도다.

미국과 유럽의 공식적인 첫 갈등은 지난 10월 미국에서 체포된 모로코계 프랑스인 자카리아 무사위의 경우다. 단순한 이민법 위반으로 체포된 무사위는 9.11 테러와 관련돼 기소된 첫번째 인물로 사형선고가 예상되고 있다. 그가 프랑스 영사의 도움을 거절했지만 마릴리즈 르브랑쉬 프랑스 법무장관은 "무사위에 대한 사형판결도, 특수법정에서의 재판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갈등은 그 전에도 있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요청으로 영국에서 체포된 알제리인 로프티 라이시의 경우다. 영국 정부는 자살 테러범들에게 비행기 조종술을 가르친 혐의를 받고 있는 라이시를 미국에 인도하길 거부했다.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외국에 범인을 인도한다는 EU 규정 탓이다.

범인 인도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가능성이 크다. 9.11 테러와 관련된 주요 용의자들이 모두 유럽에서 체포됐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국가들이 구금하고 있는 알 카에다 조직원은 20여명에 달한다. 특히 스페인은 8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을 포함, 14명의 주요 혐의자를 체포해 놓고 있다. 갈등의 골을 메우기 위해 존 애슈크로프트 미 법무장관이 11일 부랴부랴 유럽 5개국 순방길에 올랐지만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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