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아주 특별한 출판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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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커뮤니티'라는 문제를 주제로 삼은 어떤 세미나 자리에서 사회학자가 미래의 커뮤니티는 장소를 배제한 채 이뤄진다고 단언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사이버 공동체를 그 예로 들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게다. 초고속 정보사회인 요즘에 이 사이버 공간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접속이 이뤄지며 수많은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 인터넷이 만든 가상현실

또한 그 이용자 수의 증가율도 가위 폭발적이다. 소위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이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비몽사몽과 다름 아닌 가상현실이란 어디까지나 가상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연전에 읽은 외신에 의하면 미국 플로리다 지역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세트가 있는 동네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영화 속의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대사처럼 말을 하고 배우처럼 입고 다니면서 자기가 아닌 남의 삶을 산다고 했다. 가상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린 거짓된 삶이 만들어진 것이다.

왕건의 촬영장이 개성에 있지 않고 충청도 어딘가에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세트의 도시는 허물어질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만드는 가상현실도 이 세트와 다를 바 없다.

스크린 속에 나타난 영상과 언어를 통해 무궁무진한 삶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듯하지만 로그아웃하고 난 후, 즉 그 세트가 사라진 다음, 현실의 세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밀폐돼 있는 땅에 남겨진 자신일 뿐이다.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 세계는 땅과 장소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실제의 도시는 그러면 땅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인가. 나는 의심의 눈길을 지울 수 없다. 일산을 가든 분당을 가든, 아니면 새로운 도시를 가보아도 거의 같은 도시풍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기가 서울인지 부산인지 광주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도시도 비슷한 풍경이 돼가고 있다.

그뿐 아니다. 내 사무실이 있는 대학로는 마치 건축세트의 전시장 같다. 하루에도 건물의 표정이 바뀌고 거리의 풍경이 변화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세트로 이뤄진 가상의 도시일 뿐이다. 즉 지속되지 않는 사회이다. 지속될 수 없는 도시의 풍경에서 지속적 공동체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부유(浮遊)하는 도시에서는 도무지 우리가 가진 기억조차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파주의 한 부근 28만평의 땅 위에 출판인들을 중심으로 한 출판도시가 세워지고 있다. 이 도시는 종래 우리가 이 땅에 세웠던 도시와 여러 가지가 다르다. 우선 땅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하는 도시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려 하며 새로 집을 짓지만 오래된 땅에 오래 전에 세운 도시처럼 보이길 원하는 그런 도시다.

무엇보다 집을 먼저 세우는 게 아니라 비워야 할 곳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 부분에 집을 채운다. 따라서 비움이 가득 찬 도시다. 집들도 옆의 집들보다 작게 보이려 원하며 모든 집이 다 고만고만하다.

*** 비움을 정한뒤 집 지어야

나의 뜰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이곳에 담장이 있을 수 없으며 서로의 공간을 모두 공유하고 서로를 확인하는 삶을 살게 된다. 상투적 가로수가 있지 않고 들풀과 들꽃이 조경수이며 은빛 갈대가 빛나는 샛강이 굽이굽이 흐른다.

특히 이 도시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강 하류의 느린 모습과 황홀하게 펼쳐지는 낙조는 이 도시가 갖는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이 도시의 건설이 또 하나의 신도시를 세우는 종래의 상투적 일이 아니다. 특별한 장소를 토대로 건설되는 이 도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며 우리 삶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다. 이를 위해 현재 국내외 건축가 30여명과 1백여명의 출판인들이 이 어려운 시대에 거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공동성의 가치'라는 주제를 내걸고 바로 오늘 파주 벌판에서 전체 도시의 건축설계에 대한 전시회가 열린다. 거짓 공동체가 만연하는 요즘의 부유하는 시대에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일이다.

承孝相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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